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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언어로 사랑하며

변방의 언어로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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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8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188쪽 | 290g | 130*210*13mm
ISBN13 9791189467661
ISBN10 1189467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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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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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또 여름이 왔다고 말하는 것은
축축하게 땀으로 젖은 내 등을
바람으로 깎아놓은 거친 손으로 훑어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손가락 끝이 유독 단단했던 당신의 손톱은 언제나 창백한 회청색이었다
손톱이 왜 파랗지요 하고 물으면
요 안에는 바람이 담겨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던
당신의 입술에는 뼈가 없었다
--- p.11

모리스 블랑쇼가 말했듯, 사랑은 의지가 아니라 우주의 논리 속에 갑작스럽게 생긴 균열로 발생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당연히 단 하나의 타자를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모든 타자들을 가리고 무화시키고 유일한 자로서 염두에 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사랑한다는 것은 전부가 형편없이 망가졌다가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복구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만들어진 나는 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걷고 말하고 이해한다. 여러 색깔과 빛의 사랑을 통과하면서 여러 번 망가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완전한 파괴법이자 완전한 구원의 방법, 사랑. 이 사랑은 수많은 방법으로 정의될 수 있다.
--- p.13

오직 사랑으로 움직이는 사고가 얼마나 대단한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지금 당장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같은 색의 옷을 사는 건 사랑의 사고가 아니다. 내가 좀 더 많이, 다만 느리게 걷고, 먼저 사과하고, 더 많이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으로 움직이는 사고다. 이 사고에 가장 중요한 건 그야말로 ‘굉장한’ 체력과 인내심과 여유다. 사랑은 발산의 작용이다. 이 작용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충만해야 한다. 난 부족하고 가난한 상태에서 사랑하고 싶지 않다. 내가 힘들고 텅 비어 있을 때 채워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충만하고 건강한 순간에 취미처럼 하는 사랑이 좋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충만하기는 어렵고 그 충만한 마음으로 발산의 작용을 하는 건 더 어렵다. 나는 비겁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형태의 사랑을 아직 완전히 해보지는 못했다. 나는 자꾸 사랑 앞에서 구구절절한 사람이 된다.
--- p.35

내게 사랑은 인류가 선택한 생존의 방식이다. 생존을 위해 연대와 유대, 그리고 사랑을 그 방식으로 선택한 종족. 나는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좋다. 인간 종족의 한 일원으로서 투쟁의 방법으로 사랑을 확장시키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나를 견디고, 나와 화해하고, 나와 세상을 만드는 방법이다. 동시에 나를 한순간에 초월해버리는 사랑의 흔적을 고백하기 위해 기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수많은 ‘너’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기억들. 사막 한가운데에서 먼저 걸어가며 나를 돌아보고 웃던 너, 내 귀에 꽂아놓은 연필을 빼주며 입 맞추던 너, 새벽에 동시에 어렴풋하게 깨서 서로 허겁지겁 잡던 손, 뜨거운 여름 공기에 얼룩진 화장을 하고 첫차를 기다리던 것. 이런 장면들은 엮이고 엮어서 여름 햇빛을 뚫고 한참 달려온 것처럼 내 목덜미를 갈색빛으로 물들인다. 사랑의 색깔이라고 내보일 수 있는 것이다.
--- p.40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 비유하는가에 따라 그 시선의 마음과 사랑과 무게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A를 B에 비유한다. 그것은 A를 위해 B를 누르고 넓히는 과정이다. ‘사랑’과 ‘멈추지 않음’을 어떻게 덧붙이고 설명할 수 있는지를 상상해본다. 영원이 아니라 ‘멈추지 않음’이라고 말하는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이 마음은 내가 함부로 모든 것을 끊거나 자르려고 하지 않는 노력의 태도다.
--- p.41

내가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질문은 또 있다. 사랑은 어디서 시작하나? 라는 질문이다. 사랑이 어디에 연원을 두고 있는지, 사랑이 대체 무엇인지. 나는 이 질문에 한 번도 대답해본 적이 없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이 질문이 그렇게 대답하기 쉬운 것이었다면 세상에 수많은 시와 그림과 노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그 질문에 ‘나에게서, 그리고 내가 만든 너에게서’ 라고 대답할 것 같다. 아닌가. 정말로 그럴까? 나는 신과 사랑은 분리해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은 사랑보다는 질투와 분노에 어울린다. 그는 언제나 잔뜩 화가 난 장엄한 얼굴로 구름 뒤에 서 있다.
--- p.73

내게 친구들은 미신 같다. 내가 그들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 흰 선만 밟는다거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도어록을 해제하고 집에 들어가야만 하는 이상한 규칙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일들에는 모종의 논리적인 문법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규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말할 때 나는 조금 괜찮아진다. 불안하다는 건, 나의 경우 모든 것이 너무 지나치게 잘 정돈되어 있고 완벽하게 정해져 있으면 생기는 감정이다. 그래서 문법을 지키지 않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지 않으려고 한다. 올해 새 선인장 화분과 함께, 새롭게 들일 버릇이다.

그리고 이 글을 모두 읽으면 다들 내 친구가 되는 거다. 내 친구들은 모두, 너무 많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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