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의미와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질문은 우리의 의식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며 우리를 괴 롭힙니다. 모든 사람이 이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과학적이 지도 않고 긍정적이거나 자명하지 않으며 증거도 없고 찬반 양론으로 대할 수도 없는 이 질문은 수천 년간 격렬하고 떠들썩한 논쟁을 일으켰으며 그렇게 논쟁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 pp.15~16
인류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 지금까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해, 죽음의 모호성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편에서는 죽음 이후 존재하는 다른 세계의 존재를 옹호하며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 삶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들은 삶이 덧없고 악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른 세계’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옹호합니다. 그들은 현재라는 이름 아래 영원과 관련된 모든 가능성을 거부하며 사실상 인간을 우연하고, 덧없고, 한시적인 사건으로 격하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이 두 입장 중 하나를 받아들여야 할까요? 무의미한 두 가지 주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일까요? 전자는 창조주-하느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분의 창조를 거부하고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에서 분리되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후자는 이 세계가 무의미함만이 가득한 끔찍한 곳이라는 이해를 표현합니다. 이곳에 남게 된 인간, 이 세계를 이용하고 탐닉하는 인간은 우연히 이 세상에 떨어진 방문자이며 결국 필멸할 존재입니다. 이 끔찍하고 두려운 딜레마는 우리에게 반드시 이어지는 물음에 답할 것을 요구합니다. ‘죽음이라는 질문,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이 끈질긴 질문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 pp.19~20
포이어바흐를 비롯한 유물론자들은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원한다. 인간은 번영을 원한다. 배부름을 원한다.’ 그러나 이미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에게 자유와 번영, 배부름이 무슨 소용입니까? 어째서 묘지에 별장을 지어야 합니까?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든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르게 되고,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말마따나 “죽음과 시간이 이 땅을 지배”할 뿐인데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답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갈망합니다. 일시적인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 우리가 성가에서 “쇠하여지지 않는 삶”이라 부르는 삶을 갈망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는 그 생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호흡은 그 생명을 갈망하고 추구할 가능성을 주지만, 공기에도 그 생명은 없습니다. 건강한 몸에서조차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 생명은 오직 생명 그 자 체이신 분 안에, 하느님 안에, 그분을 아는 지식 안에, 그분과 나누는 교제 속에, 그분께 온전히 사로잡혀 그분을 사랑하고 찬미하는 중에만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을 운명에 처한, 자신이 먹는 음식의 노예가 된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이유입 니다. 이것이 구원, 죽음과 생명, 부활과 회복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주제를 구성합니다.
--- pp.79~80
‘유익’은 그리스도교의 판단 기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기준은 진리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목적은 사람들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돕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 그 진리를 통해 구원받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구원은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종교와 세속주의가 별다른 유익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충분한” 도움을 주어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때문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목적이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 인간이 죽음과 화해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교는 쓸모없는 종교일 것입니다. 다른 종교가 이미 그 역할을 했고, 실제로 그리스도교보다 더 잘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속주의는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까지 감내하는 이들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죽음과 화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죽음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생명을 드러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 생명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생명이시기에 그리스도교는 죽음을 설명해야 할 ‘신비’가 아닌, 멸망 당할 원수로 선포합니다. 종교와 세속주의는 죽음을 설명하며 죽음에 어떤 ‘상태’를 부여하고, 이를 ‘정상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리스도교만 이를 비정상적이며 끔찍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라자로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셨을 때, 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셨을 때, 그분은 “매우 놀라며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으로 본다면, 이 세상과 인류의 삶은 얕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태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뭔가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 pp.98~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