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세속주의가 특정한 마음 자세나 태도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신비적 경건주의는 세속주의를 세상에 빠져 있어서 그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무언가로 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 믿음과, 세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든 기독교 학교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이런 학교들은 콘돔, 칼, 싸움, 마약 거래, 인종 갈등, 공공연한 무신론적 가르침 등등에서 도망친 망명자들로 넘쳐납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이 같은 반작용은 성경적 교육의 관점과 전혀 양상이 다릅니다.
양념이나 조미료를 첨가하는 것처럼, 출처가 다른 온갖 지식 체계에 신앙을 그냥 덧입히는 두 번째 대안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습득한 지식을 누구나 즐겨 먹는 흰 쌀밥에 비유한다면, 저마다의 신앙은 우리 몸에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반찬에 비유할 수 있는데요. 이것이 아이를 공립학교에 보내는 수많은 그리스도인 부모가 취하는 관점입니다.
이렇게 공립학교에서 온갖 ‘가치 중립적’ 과목을 가르치는 줄 알면서도, 부모는 그저 집에서 조금만 거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연히, 중립은 ‘불가능’합니다. 최근 점점 더 많은 부모가 이런 실상을 발견하고 있는데, 지난 1세기 남짓한 세월 동안, 이 ‘중립적인 쌀밥’에 ‘지독한 불신앙’이라는 성분을 집어넣은 사람도 있습니다. 현대 복음주의 진영에서 젖은 스펀지처럼 맥 빠진 신학적 예리함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제는 우리도 다소 엉뚱해 보이는 것을 잡으려고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 학교는 공립학교와 같은 커리큘럼을 사용하는 기본적 접근 방식을 채택하면서, 기도나 성경 공부, 예배를 덧붙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교육은 예전부터 존재하던 지식의 태양계에 새로운 행성을 덧붙이는 것이기에, 매우 색다르게 보입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교육은 성경을 태양으로 보는 동시에 중심으로 삼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입니다. 바로 그 태양의 빛이 우리에게 다른 모든 것을 볼 빛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없으면 객관적 실체도 없고 어둠만 존재할 뿐입니다.
---「1강」중에서
교사들은 대부분 일상의 교실에서 벌어지는 징계 상황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관리자는 담임 교사들이 학급 운영 규정을 올바로 발전시키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특히 신입 교사들에게 더 그렇습니다. 실제로, 관리자가 해당 학급 담임 교사에게 적절한 운영 지침의 초안을 제공해주는 게 가장 바람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개별 교사의 성향과 필요에 맞게 규칙을 만들기 위해 여러 수정 사항들을 함께 토론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각종 위반 행위를 장황하게 적은 목록보다 전체적이고 간단명료한 규정이 훨씬 낫습니다. 교실 징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가 일관성 있게 규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존경심을 잃는 가장 쉬운 한 가지 방법은, 징계 실행 과정에서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좋은 부모인 교사들의 가장 큰 장점은 기꺼이 징계를 실행하려는 의지와 능력입니다. 신입 교사들은 자연스럽게 학생들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흔히 그들은 학생을 징계하면 그 학생이 자기를 싫어하거나 미워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교사들은 경험상 현실은 그와 정반대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이를테면, 학생들은 일관성 있게 징계를 실행하는 교사를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부모인 교사들은 징계하는 것을 그리 주저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관리자들은 이런 필요를 다룰 자녀가 없는 교사들을 따로 교육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3강」중에서
수학의 진리를 비롯하여 다른 모든 진리의 기초는 성경의 하나님입니다. 수학의 다양한 양상은 하나님의 논리적 성품과 그분의 창조적이고 섭리하시는 능력을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수많은 본성을 간직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유일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인격으로 존재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복수적 특성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피조 세계도 그런 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궁극적 실재는 하나가 아니라, 하나인 동시에 다수입니다.
피조 세계는 실재하며, 실제로 각자 다른 것과 구분되는 동시에 일일이 헤아릴 수 있는 고유한 특색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라는 다윗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피조 세계는 그분의 일부 속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수학 개념들에 대한 신뢰할 만한 기초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헤아릴 수 있는 속성들은 산수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이 공간에 두루 편재하시는 분이라는 진리는 기하학을 위한 진정한 척도와 토대를 제공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광대하심은 계산법에서 무한대 개념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5강」중에서
고전교육 구조에 관한 기본 원칙은 ‘트리비움’Trivium입니다. 트리비움은 ‘세 가지 길’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단어인데요. 여기에는 ‘쿼드리비움’Quadrivium(‘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학’의 4학과)을 준비하기 위해 공부하는 세 과목이 포함됩니다. 트리비움의 구성은 역사적 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바뀌는데, 우리 목적에 맞춘다면, 문법과 논리와 수사 같은 과목으로 구성됩니다. 특정 과목에 상관없이 절대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트리비움이 언제나 학생들에게 쿼드리비움을 준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고전교육 구조를 성공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교사들은 장차 교육적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준비시키는 중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교육의 성공을 판단하는 기준은 현재를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트리비움을 공부하는 동안, 학생들은 학습에 필요한 연장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 쿼드리비움 단계에서 공부할 때 이런 연장들을 구체적으로 활용하게 될 것입니다.
---「7강」중에서
기독교 관점에서, 역사 이해의 중요성은 감히 함부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 믿음은 역사, 특히 역사 가운데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존합니다. 트라야누스Trajan 황제의 로마 통치 시기에 활동한 위대한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 시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선고로 사형에 처해진 그리스도’를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타키투스가 전해준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이유로 돌아가셨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절대 무오하고 유일한 역사 기록인 성경의 증언을 믿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도 읽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가장 두드러지게 구별하는 기본 특징인 복음은, 역사적 문제의 본질입니다.
---「12강」중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깨달아야 할 것은, 성경적 사고와 매력적인 글쓰기가 대조적 개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현대 문화에서 이 둘을 조합하려는 시도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은, 지난 세기에 전반적으로 나타난 문화적 배교 이후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혀온 회피주의자 같은 정신 자세를 웅변할 뿐입니다.n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과감히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별 의미 없는 기독 서적을 저술하거나 읽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 문학 프로그램은 학생들에게 기독교 서적을 읽히는 수준의 활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훌륭한 문학 작품을 읽도록 가르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작품을 읽는 동안 생각하는 법을 익히는 프로그램입니다. 그 시간을 통해 아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문장을 감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말씀의 백성이며, 결과적으로 언어를 잘 구사하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언어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고, 그 이해한 바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13강」중에서
기독교 학교 설립 계획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에 관한 자신의 동기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은, 가장 중요하고도 일차적인 관심사입니다. 아주 진지하게 말해서, 학교 세우는 일에 과감히 뛰어들어 헌신하겠다면, 여러분(과 초기 단계에 관련된 모든 사람)은 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도대체 왜 학교를 시작하려고 하는가?”
연애할 때처럼 상기된 얼굴빛이 신속하게 사라지기 전에, 그런 감정 아래 있는 실체 속으로 얼른 뛰어 들어가는 편이 더 낫습니다. 그 아래에는 꼭 필요한 실질적 기초를 탐색하는 여러 질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전교육 학교를 세우려는 일차 동기」중에서 어디까지가 반사적 충동이고, 어디까지가 이성적 추론일까요? 공립학교를 떠나는 이유는 불을 보듯 분명하고 뻔할지 모릅니다. 거기에는 명시적 문제와 암시적 문제가 수없이 존재합니다. 로고스학교에 자녀를 보내려는 학부모들을 여러 해 동안 만나면서, 저는 그런 동기를 갖게 되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반사적 충동이라고 부르는 범주로, 여기 해당하는 부모들은 “~라는 이유로 저는 도저히 공립학교를 견딜 수 없어요. 그래서 다른 걸 시도하기 원한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반면 또 다른 범주인 이성적 추론을 하는 부모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는 아이들을 성경적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할 최선의 방법을 찾는 중이지요.
물론 두 가지 동기가 뒤섞인 경우도 있습니다. 교육에 관한 성경적 확신을 가진 동시에, 공립학교에 환멸을 느낀 부모들이 그런 경우인데요. 어쩌면 이것이 여러분의 상황을 대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20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