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한 편이 개봉할 때에 업무 프로세스는 대개 이렇다. 영화 개봉 전 제작보고회-언론 시사회-언론 시사회 직후 간담회-인터뷰가 순서대로 열린다. 그러면 영화 기자는 제작보고회에 갔다가 기사를 쓰고, 언론 시사회에 가서 영화를 본 후 그 직후에 열리는 간담회에 참석해 기사를 쓴다. 그러고 나서 개봉일에 맞춰 리뷰 기사를 쓴다. 출연 배우 인터뷰를 적게는 1~2명, 많게는 3~4명까지도 한다. 여기에 감독 인터뷰도 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인터뷰를 각각 기사로 쓴다. 때에 따라 제작보고회와 언론 시사회 직후 간담회를 생략하기도 하지만, 그걸 빼더라도 업무량이 줄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여름방학 성수기 때에는 주요 한국 영화 약 10편이 연달아 개봉한다. 그러면 여름 내내 이 과정을 반복한다. 여기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함께 개봉하니까, 이런 외화들은 리뷰 기사 위주로 챙긴다. 이 일만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개봉작 관련 기사를 처리하면서 동시에 영화계 사건·사고 기사도 써야 한다. 여름이 끝나면 그때부터는 추석 시즌이 시작된다.
영화 기자의 일이라는 것도 결국 최동훈과 박찬욱 사이에 있었다. 〈아가씨〉가 개봉하고 나서 몇 주일 후 여름방학 성수기를 노린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시 영화 기자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 들뜬 기분은 박찬욱 감독 인터뷰가 끝난 직후 박살이 났고, 더위와 함께 바로 그 ‘업무 프로세스’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비로소 다시 차분히 일에 스며들 수 있었다. 아마도 그때쯤 기자로서, 직장인으로서 일하는 방식이 자리를 잡았다. 거창한 것은 없었다. “해야 할 일을 해나간다”라는 것. 이 일을 좋아한다는 그 마음은 아직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걸 반복해서 할 수 있다는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에 내가 했던 인터뷰들은 대단한 성공도, 특별한 실패도 없이 끝났다. 영화를 보고, 인터뷰를 준비하고,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기사를 썼다. 최동훈 감독을 만났을 때처럼 좋지도 않았고, 박찬욱 감독을 만났을 때처럼 나쁘지도 않았다. 내가 읽어 봐도 썩 괜찮은 기사가 있었고, 다소 아쉬운 기사도 있었다. 그렇게 여름이 끝났다.
---「나의 마음을 흔들고 나의 일을 망친 것」중에서
한 선배의 말이 기억난다. 그가 나의 기사를 보더니 말했다. “음……. 잘 썼어. 잘 썼는데, 우리가 영화 전문지는 아니잖아.” 알고 있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모두 다루는 종합 언론사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의 의도적인 지적에 “그래서 어쩌라고요” 같은 밑도 끝도 없는 대꾸를 하며 면박을 주고 그 기사를 왜 그렇게 써야 하는지에 관해 친절하면서도 무례하게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대신 “그쵸”라고만 말했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해 봤자 시간만 아까웠다. 게다가 그에게는 나의 기사를 수정하거나 출고를 막을 권한이 없었다. 어차피 나의 기사는 내가 쓴 대로 공개될 예정이었다. 또 어떤 선배는 말했다. “우리가 쓰는 기사는 인터넷 공간에 흩뿌려져. 기사라는 게 하루만 지나도 의미가 없어진다니까.” 나는 그의 새삼스러운 통찰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래서 어쩌라고요”라고 내뱉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때에도 나는 “그쵸”라고 답했다. 그에게도 나의 기사를 수정할 권한은 없었고, 나의 기사는 내가 쓴 그대로 대중에 노출되었다.
기자 생활 10년째이다. 아주 긴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10년을 일했다고 생각하면 나 스스로도 잘도 견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0년간 기자 외에 다른 직업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천직까지는 아니어도 잘 맞는 일이라고 여기기는 했다. 기자 일을 관두지 않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기사 쓰는 일, 글 쓰는 일에 질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글이 전보다 나아졌다는 느낌을 꾸준히 받은 것이 큰 동력이었다. 실제로 과거에 썼던 기사보다 최근에 쓴 기사가 낫다는 것을 스스로 수차례 확인했고, 기사를 쓸 때 나만 알 수 있는 어떤 감각 같은 것이 더 좋아졌다고 판단했다. 그 감각은 정확히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예전보다 경험이 쌓여서 생긴 변화인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의 글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 일을 조금 더 해도 괜찮겠다는 용기가 생긴다. 밤늦게까지 기사를 붙잡고 있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하던 적이 있었는데, 그게 아무 의미 없는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 나를 위로해 준다.
---「저널리즘? 나는 날 위해서 쓴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