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스 일행은 20일에 군산에 도착하였고, 계속하여 목포와 나주를 관찰하고, 광주를 거쳐 내륙을 통해 다시 군산에 이르렀다. 그녀는 전킨과 드루가 이미 자리 잡은 군산에서 육로로 4.5마일(7km), 해로로 2마일(3.2km) 떨어진 구암(궁말)에 집을 구하였다. 작은 시골 마을인 구암에 자리한 데이비스의 초가집은 강변 위에 있어서 경치는 아름다웠다. 생활면에서 서울과 군산은 완전히 달랐고 사람들과 인심도 달랐다. 군산에서 예배는 전킨의 사랑방에서 드렸다. 예배를 드릴 때 2~3가지 색깔의 깃발을 달아서 여성 예배, 어린이 예배 등을 구별했다. 주간에는 대개 2~3번의 집회가 있었다.
---「“우리 선교사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 해리슨 부인 선교사」중에서
무엇보다도 마요셉빈은 여자 성경 교육에 헌신하였다. 1909년부터 여자성경학원, 1918년부터 선교회여자성경학교, 1925년부터 한예정성경학교, 1937년부터 특별여자성경학원 등에서 책임자나 교장으로 헌신하였다. 마요셉빈의 성경 교육적 영향은 전주를 넘어 남장로교 선교 지역의 모든 여성에게 확산되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인 성경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 생활에 힘쓰도록 열심히 가르치고 도왔다.
---「전북 여성 성경 교육의 기획과 실천자: 마요셉빈 선교사」중에서
식민주의 시대에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동남 지방의 에코용과 에뇽 골짜기에서 선교한 슬레서와 한국에서 선교한 셰핑은 현지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들은 정치적 동일화 선교를 하였으나 접근에 있어서 차이를 드러냈다. 전자는 1892년부터 영국의 부영사로서 원주민과 동일화를 이루어 원주민을 대상으로 재판을 하여 사회 악습 근절 등 문명화 선교했다. 후자는 가난한 소녀와 여성들과 정치적 동일화를 이루어 성경 교육, 조선간호부회 활동, 여성 산업 활동, 공창 폐지 운동 등을 시민사회단체들과 더불어 행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드러냈다.
---「식민주의 시대 정치적 동일화 선교 비교 연구: 슬레서와 서서평」중에서
서서평은 1915년에 스프루(Sprue)에 감염되었다. 그는 이 병으로 인하여 먹은 음식의 양도 적었지만 이를 소화시키지 못하여 언제나 배고프고 허기지고 쉽게 피곤을 느껴 자주 침대에서 드러누웠다. 서로득 선교사 부인과 제주도 선교 여행을 갔을 때 서서평은 너무나 지치고 기력이 쇠진하여 침상에 누워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임종 전 4달 동안 아파 누워있을 때 서서평은 학생들을 자기의 집으로 불러 [거실의] 침상에서 가르쳤다.” 이렇듯이 서서평의 삶의 상당 부분이 집과 거실과 침상에서 이루어졌다. 주변부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이들을 가르치고 자립시키기 위하여 서서평은 성공이 아니라 섬김의 영성을 실천하며 살았다. 이 섬김의 영성은 서서평의 생활 공간인 거실에서 시작되어 주변인들을 자립하게 하여 여성의 인격과 주체성을 살리는 선교를 이끌었다.
---「섬김의 영성으로 주변부 사람들과 함께하는 변혁 선교: 서서평 선교사」중에서
패터슨은 연구하는 의사 선교사였다. 그는 수많은 의학책과 자료들을 구입하고, 장비들도 개인적으로 구입하여 연구하고 발표하고 의료 시술에 활용하였다. 1912년 한국의료 선교사협회(Korea Medical Missionary Association)의 연례회의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제목은 “외과 수술과 세균학”(Bacteriology of Surgical Work)이었다. 그는 실제로 외과 수술에 있어서 실험실 보조자들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들을 특별 전문가로 교육하여 박테리아 수의 많고 적음 등을 보고토록 하여 수술의 성공률을 높일 수 있었다. 1916년 4월 26~27일에 세브란스병원에서 열린 연례학술대회에서 그는 “한국 부인에게 자주 발견되는 방광질누관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그는 한국 의료와 질병 상황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이를 의료 시술로 접목함으로써 한국 의료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는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1910~ 1920년대에 가장 유능한 외과 의사로 군산 예수병원의 명성을 높였다.
---「자기 희생적 삶과 정신을 실천하다가 스프루 병으로 순직한 의료 선교사: 제이콥 패터슨 의료 선교사」중에서
“어느 날 아침 우리는 총 25명의 환자 중 21명을 무료로 치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비율이 맞지 않는 경우지만, 우리는 병원비를 지불할 돈이 없는 가난한 내원 환자 누구도 돌려보내서는 안 되는 규정을 만들었다. 재정 사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료 환자로 여길 수 있는 수많은 사람을 치료한다. 한국의 일용근로자들은 정말이지 하루 벌어 겨우 하루를 생존한다. 좀 더 나쁜 경우 이들은 병이 들면 수입이 끊기고 그러면 이들은 굶주리고 병이 들어 (병원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하고) 죽는다. 집은커녕 방 한 칸도 없이 심하게 중병을 앓는 수많은 한국인을 우리가 치료한다. 병원 접근을 할 수 없다면 이 불행한 사람들은 길바닥에 나앉아서 (운이 좋으면) 살아나거나 아니면 죽는다.” 로저스의 이러한 자선적 의료 선교는 순천 중심의 전남 동부의 가난한 농촌사회의 질병 상황에서 구상되었다. 가난하여 굶주리고 실직하고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빈농 병자들에게 자선을 베풀어 무료로 치료하고 복음을 전하여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
---「무료 시술을 실시한 의사 선교사가 ‘작은 예수’로 불림: 제임스 로저스 의료 선교사」중에서
전남 동부 지역의 산악 지대를 다니며 순회 전도를 할 때 부딪치는 지리적 환경은 선교사에게 고통의 길을 걷게 했다. 이러한 자연적 지형과 지리 환경에서 광주선교부의 오웬 선교사는 1907년 전남 서남부 지역 순회에 집중하면서 또한 전남 동부 지역(곡성, 동복, 구례, 순천, 광양, 여수, 돌산, 흥양)을 공식적으로 순회 전도하였다. 그는 서남부 지역인 장흥을 순회하다가 광주에서 1909년 4월 3일 순직하였다. 오웬의 서거 후 1909년 프레스턴과 코이트 선교사는 그의 업적을 살피고 순천이 선교부의 위치로 적절한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광주에서 순천에 이르는 길을 걸었다. 이들의 몸은 무척 지쳤다. 코이트 선교사는 특히 프레스턴 선교사가 지치고 피곤하여 건강을 해칠까 염려했다. 산간 내륙인 광주에서 다른 산악 지역인 순천에 이르는 100km의 길은 산악 지역을 주로 관통하는 노선으로 5~6개의 험산 준령을 넘어야 했다. 2주간의 순회를 마치고 광주로 복귀하는 여정 내내 이들의 몸은 심하게 고통을 느꼈다. 이들은 동부 지역 교회를 돌보고 전도하기 위해서는 순천에 선교부를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자생적 신앙 공동체로 시작한 순천선교부의 개설 배경사 연구(1892~1912)」중에서
과거 한국에서 진행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산업 활동 선교와 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개화 초기에 입국한 이들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미션학교를 세우고, 성경 교육과 기독교 인문 교육을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당시 절대적 빈곤 상황에 있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하여 한국선교회는 산업부를 만들어 자조 정신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산업 활동을 함으로써 학비나 기숙사 생활비를 벌었고, 더 나아가 노동의 가치를 배우고, 장래의 직업을 준비하였다. 여성들에게는 바느질 일감과 자수 일자리(직업)를 제공하여 남성 지배적 사회로부터 사회적 해방을 누리게 했다.
---「한국선교회의 광주선교부와 순천선교부의 산업 활동 선교 연구(1907~1937)」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