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에 김성탄본이 그토록 인기를 끌었던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가 “천하의 문장 가운데 『수호전』만 한 것이 없고, 천하의 세상 이치에 통달한 군자 가운데 시내암 선생만 한 이가 없다”고 극찬하며 역사상 최고의 책으로 평가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때까지 잡서로나 취급되던 소설을 가히 문장에 도움이 되는 경전 이상의 필독서로 대담하게 격상시켰던 것이다. 국내에서도 조선시대에 『삼국지연의』가 사실상 역사서로 간주되면서 과거시험에 관련 문제가 출제되거나 시험 답안에 관련 내용이 빈번히 등장한 경우나, 근래 대입 논술시험 열풍이 한창 거셀 때 『삼국지연의』가 학생들의 논술 대비 필독서의 하나로 인식되었던 것과도 상통하는 현상이었다고 할 만하다.
--- p.30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는 북방 민족,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사치향락에 빠진 황제와 국정을 농단하는 조정의 간신들, 부정과 수탈, 횡포를 일삼는 지방 관리와 아전들, 제구실 못 하는 기강 잃은 군대, 도처에서 들끓는 도적과 반란세력들, 가지각색의 시정市井 악인들……. 소설 속 각계각층 사회 구석구석에는 당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그런 환경을 살아가는 중생의 찌들고 일그러진 모습들이 자못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간혹 현능한 관료나 올곧은 인물이 등장하여 작은 희망의 빛을 드러내는 듯하지만, 예외적인 소수에 불과한 그들이 부조리로 가득한 말기적 상황을 바꿔낼 도리는 없었다.
--- p.57
이러한 구도 속에서 호한들의 최종 귀착지가 되는 곳이 바로 양산박이다. 산동 서남부에 실재하는 공간이기도 한 이곳은 거대한 저습지와 호수 한가운데 솟은 땅이 수중 요새를 이뤘던 둘레 800리의 드넓은 지역이다. 물로 둘러싸여 바깥세상과 격리되어 외부로부터 접근하기 어렵고 방어하기 좋으면서도 물길 등을 이용해 각지로 이동하기 좋은 지점이었다. 실제로도 오랜 세월에 걸쳐 밀거래를 하는 비밀결사나 도적들의 좋은 은신처 역할을 해왔다. ‘수호전’이란 제목도 양산박의 이러한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되었다. ‘수호水滸’란 물가를 뜻하는 말로, ‘수호전’이란 곧 이런 지리적·공간적 특징을 지닌 ‘물가에서 일어난 이야기’, 좀더 풀자면 강호 녹림객들의 이야기라는 의미인 것이다. 물론 소설 속의 양산박은 실재를 그대로 재현한 것은 아니고 가공이 더해진 상상의 공간이다.
--- p.71
여기서 잠시 108이라는 숫자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송대에는 36인의 두령들만 이야기되던 것이 원대 이후에 72명이 보태지면서 108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야기가 갈수록 인기를 끌자 조정과 관군에 맞서는 세력으로 묘사되는 양산박 집단의 규모를 그에 걸맞게 늘릴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또 그런 거대한 집단 구성의 기능적 요구에 있어서나 나름의 완결성 구비 면에서도 이러저러한 특징과 장기를 지닌 다양한 구성원들이 보강되어야 했을 것이다. 거기다 36과 72라는 숫자는 고래로 중국인들이 여러 방면에서 관습적으로 써왔던 친숙한 것이기도 했기에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108이란 숫자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p.77
그중에서도 핵심은 양산박이 자리한 산동이다.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산동 하면 ‘산동호한山東好漢’ 또는 ‘산동대한山東大漢’이라 하여 호방하고 의협심 강한 ‘사나이’ 이미지로 유명한 지역이다. 산동 남성들의 타고난 기질이 그러하다는 것인데, 수호 이야기의 유행도 이러한 인식 형성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하북 역시 고대에 호협함을 대표하는 지역이었다. 일찍이 전국시대에 약소국이었던 연나라의 복수를 위해 진시황 암살을 시도했던 비운의 협객 형가荊軻는 이 지역의 영웅적인 의협 기질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장 역할을 해왔던 이 지역은 상무 정신이 투철하고 각종 무술이 발원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 p.78
그렇다면 양산박의 리더로서 송강의 면모는 어떠한가. 대규모 무장 세력의 영수이지만 개별 인물로서의 송강은 무예로나 전공戰功으로나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다든지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보다는 툭하면 수심에 휩싸이고 눈물을 보인다는 이미지가 더 강하다. 노준의와 스스로를 비교한 자평은 상당 부분 ‘객관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럼 무엇이 그를 리더로 자리매김하게 했는가. 단순화하자면 기본적으로 덕성과 대의명분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p.87
송강이 내용상 핵심 인물이자 주인공이라면 이규는 그의 가장 충성스러운 수하로서 아마도 독자들의 뇌리에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복잡한 송강과 달리 단순하면서도 역시 대조적인 양면성을 드러내는 캐릭터이다. 이규라는 인물이 원나라 때 이미 온 무대를 평정하다시피 할 만큼 사랑받은 것은 살벌한 살인마이지만 충직한 수호자이자 통쾌한 응징자이면서 순진무구한 어릿광대이기도 한 복합적 매력을 지닌 캐릭터 덕분이었을 터이다. 108호한이 대개 그러하지만 이규는 작품 속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크히어로형 인물로 꼽을 만하다.
--- p.99
108호한 중에서도 슈퍼히어로를 꼽는다면 노지심과 무송은 절대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두 인물은 이규와 더불어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린 캐릭터이기도 하다. 두 사람 모두 거구에 괴력의 소유자이자 강직하고 정의감이 남다른 인물이다. 양산박 가담 이전에는 군인이었던 점이나 불교적 이미지를 보이는 점, 두주불사의 애주가라는 점 등에서도 공통점을 보인다. 양산박에 오르기 전부터 같은 도적패로 함께 활동하고 양산박 가담 이후에도 종종 짝을 이루어 활약하며, 최후의 모습에서도 유사성을 드러낸다. 배다른 형제처럼 유사한 듯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 p.100
『수호전』은 불의와 악에 맞서는 호한들의 통쾌한 응징과 복수의 활약상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의 활극 가운데 때로는 오늘날 독자의 시각에서 볼 때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면들도 결코 적지 않다. 호한들이 무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종종 과도한 잔혹성을 드러내는가 하면 수많은 무고한 희생이 뒤따르기도 한다. 죄 없는 백성, 특히 하층 여성이나 유아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무참하게 살해되는 대목들에서는 목불인견의 섬뜩함을 떨치기 어렵다.
--- p.141
그렇다면 폭력이 난무하는 거친 사내들의 이야기 속에서 여성들은 또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이 같은 맥락 속에서 여성들의 운명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수호전』에서는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여성 인물 자체가 드물다. 그에 비해 요녀, 간부, 악녀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의 여성들은 줄기차게 등장한다. 기본적으로 여성들에 대해서는 차별과 비하를 넘어 적대시하는 듯한 경향을 보인다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은 아니다. 송강에게 살해되는 염파석은 창기 출신으로 송강 몰래 외도를 하고 후에 송강의 약점을 파고들어 궁지로 모는 악독한 간부로 묘사된다. 역시 하층민 출신으로 남편 몰래 외도를 하고 결국 남편을 독살까지 했다가 무송에게 살해당하는 반금련은 음부로 묘사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외도와 악행을 부추긴 뚜쟁이 왕 노파王婆 역시 능글맞은 악녀로 묘사되며 끝내 능지처참을 당하고 만다.
--- p.144
북송의 수도 개봉에는 이미 24시간 영업을 하는 음식점이 있었고 여름철이면 다양한 빙과류가 불티나게 팔릴 만큼 음식문화의 상업적 발전이 상상 이상이었다. 『수호전』에서도 시골의 주막집은 물론이고 도시의 음식점이나 국숫집, 찻집, 술집, 기루에 이르기까지 상업화된 음식문화 공간이 다양하게 등장하며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으로 적절하게 활용되고 있다. 하루 1000명 이상의 손님이 드나들었던 동경 최고의 술집 번루樊樓와 부근의 청루 거리, 강주 심양?陽 강변의 비파정琵琶亭과 심양루, 하북 대명부의 취운루翠雲樓 등 지역의 이름난 명소이기도 한 주점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사실성을 높인다.
--- pp.155~156
한편 작품 속에는 남방의 음식문화와 관련한 내용도 일부 담겨 있다. 송강이 강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이 대목에서는 칼칼한 생선 해장국이 등장하는가 하면, 중국인이 매우 좋아하는 금빛 잉어를 쪄서 만든 매운탕과 함께 지금의 중국인은 잘 먹지 않지만 전통 시기에는 즐겨왔던 생선회가 묘사되기도 하고, 이제는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마라麻辣’ 스타일의 두부 요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육고기보다 수산물을 선호하는 남방 음식의 특징 및 다습한 기후를 이겨내기 위해 매운맛을 즐겨온 서남방식 음식문화가 가미되어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수많은 식재료와 음식이 등장하지만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겠다.
--- pp.157~158
이들 외에 인물형상 측면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캐릭터가 바로 관승關勝이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관승의 경우 ‘삼국지’ 인물을 연상케 하거나 그에 비견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아예 드러내놓고 관우의 직계후손인 것으로 소개된다. 혈연적으로뿐 아니라 그 외모와 캐릭터 역시 관우와 빼닮았다. 9척에 가까운 장신에 대춧빛 얼굴, 봉황 같은 눈과 살쩍까지 뻗은 눈썹, 주사를 칠한 듯 붉은 입술, 세 가닥의 가늘고 긴 수염을 기른 모습이 영락없는 관운장의 형상이다. 여기에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쓰는 것도 똑같다. 어려서부터 병서를 읽고 무예에 통달했으며, 만부부당지용萬夫不當之勇과 넓은 도량까지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무장으로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셈이다.
--- pp.172~173
우리가 흔히 중화주의라고 표현하는 이런 ‘중국’ 중심적 세계관은 『수호전』에도 어김없이 드러나 있다. 황제가 양산박 무리에게 내린 조서 가운데 “온 천하에 우러러보지 않는 신하가 없도다”라는 상상의 레토릭이 등장하는가 하면, 초무를 경축하는 어연御宴에서는 ‘태평세월 만국에서 찾아와 조배하다’라는 제목의 잡극 공연이 벌어지기도 한다. 빈번히 등장하는 ‘천자’나 ‘천조’, ‘천병天兵’ 등의 표현들에도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중심 국가라는 우월적 천하관이 배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 pp.190~191
숙종 33년(1707) 어느 날 경연經筵 자리에서 지사知事 이인엽李寅燁은 숙종에게 이렇게 아뢴다. “이번 특별 무과 시험[관무재觀武才]에서는 말을 타고 창술을 겨루도록 하셨는데, 무사들이 창술에 익숙지 않아 창날로 겨루다보면 다칠 우려가 크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숙종이 “그 날카로운 날을 버리고 한 사람은 흰 옷을, 한 사람은 검은 옷을 입게 하여 말을 타고 교전한 뒤 흑백으로 승부를 결정하면 좋을 것이다”라고 하자, 이인엽은 “이 일은 『수호전』에 보이니 그에 따라 처리하겠습니다” 하고 답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숙종이 제시한 해결책은 『수호전』 제12~13회에서 양지가 주근周謹, 색초索超와 무예 대결을 벌일 때 상대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 썼던 방식을 거의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국왕과 신하 간의 공식적인 의사소통에서 『수호전』의 내용이 활용되고 있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군신 간의 공식적인 논의 자리에서 거론될 만큼 『수호전』은 당시 국내에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 p.200
중국 송대에 형성된 ‘수호’ 이야기는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여전히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서 그 생명력을 입증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호전』은 영웅 서사의 프로토타입이자 캐릭터들의 보고인 까닭이다. 『수호전』은 장르콘텐츠의 원형으로서 끊임없이 재소환될 수밖에 없는 기념비적인 지위를 지금도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 pp.219~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