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가진다는 게, 신앙을 산다는 게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도처에서 배운다. 움직이면 안 된다고, 변화하면 죽는다고 세상은 꼼짝 말라고 다그치는 듯하다. 믿고 따르는 분은 저만치 가라고, 저렇게 변해야 한다고 손짓하는데, 세상은 적당한 지점에서 적당히 타협한 채 머뭇거리며 딴짓한다. 우리가 믿는 그분께 미안해서일까, 우리는 변하지는 않지만 욕먹지 않도록 반듯이 살겠다며 자기 자리를 정돈하는 데 열심이다. 별은 저만치 가는데, 별을 그리워하나 별을 좇지는 못한다. 그 대신 여기서 잘 살겠노라 궁핍한 핑계로 다짐한다.
---「동방 박사 이야기」중에서
행복은 이성적 논리에 따른 인과 관계의 정립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행복은 극단적 대립 개념들의 화해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런 천박하고 비참하고 서글픈 삶의 자리에서도 하느님이 계시다는 간절한 외침이 행복이다. 예수님은 행복이 잘난 사람, 성공한 사람에게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삶의 역경이라 여기는 지금 이 시간, 예수님의 행복은 시작된다. 행복할 때, 행복하다고 말하는 건 너무 쉽지 않은가. 이 불행의 자리가 행복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짐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이 말하는 행복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예수님이 말(원)하는 가난의 성질이며 그 가난으로 하늘 나라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행복 이야기」중에서
마태오 복음서를 ‘교회’의 복음서라고 한다. ‘교회’, 곧 집회, 모임이라는 그리스어 ‘엑클레시아ε?κκλησι?α’가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그 교회가 하늘 나라의 가시적 표징이라는 이유로 마태오 복음서를 ‘교회의 복음서’라고 부른다. ‘진복팔단’(마태 5장)으로 시작한 하늘 나라의 선포는 ‘황금률’(마태 7,12)로 요약되며, 예수님은 ‘황금률’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신다. 휑하고 딱한 우리 삶의 자리에 기적이라 일컫는 것들, 위로라고 감격하는 일들을 예수님은 하늘 나라라는 이름으로 찬찬히 풀어놓는다. 마태오 복음서 18장은 그런 이야기의 흐름에 종지부를 찍는 듯한 이야기를 전한다. 어린아이가 되었건(마태 18,1-5), 작은 이가 되었건(마태 18,10-11) 형제는 조건 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라는 말로 끝맺는다(마태 18,21-22).
---「하늘 나라 이야기」중에서
믿음은 간절함을 기반으로 하되, 그 간절함은 철저한 해방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믿음은 간절함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것을 원하지만 저것을 내려놓는 데 주저한다. 간절함이 약할수록 해방은 더디다. 이런저런 것에 얽매여 주저하는 삶의 반복에 지쳐 생겨난 작디작은 욕망의 공허한 여백을 믿음이라 고백하기도 한다. 내려놓고 비워 낸 자리가 아니라, 무엇이건 유일한 간절함의 자리가 믿음의 자리가 된다.
---「눈먼 이 이야기」중에서
부활은 죽음을 뛰어넘는 사건으로 묘사되지 않고, 제자들이 흩어지는 것과 상반된 상황으로 묘사된다. 부활은 그러므로 ‘모아들이는 일’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흩어지는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여전히 갈릴래아라는 곳에서 제자들을 먼저 이끌어 모아들일 것이다(‘먼저 가다’의 그리스어 동사는 ‘프로아고προ?γω’로, ‘이끌다’는 의미도 있다). 그게 부활이다. 부활은 흩어짐의 분노와 충격을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모아들임의 혁명이다.
---「수난 이야기」중에서
루카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한 구원의 시대는 이러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불행 속에 잠겨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촉구해야 한다(루카 10,25-37 참조). 더불어 죄에 허덕이는 이들 역시 용서로써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갇힌 이들”(루카 4,18)은 해방되어야 한다. ‘해방’이란 단어 ‘아페시스?φεσι?’를 루카는 죄인의 용서로 이해하곤 했다(참조: 루카 1,77; 3,3; 24,47; 사도 2,38; 5,31; 10,43; 13,38; 26,18).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눈이 가려져 구원의 시대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구원의 기쁨은 전해져야 한다(참조: 루카 1,78-79; 2,30-32; 3,6; 6,39; 사도 9,8-18; 13,47; 22,11-13; 26,17-18). 누구도 예외는 없다. 어떤 것에 억압받아 제 존재의 가치와 이유가 부정당하는 일이 없어야 했다. 구원은 옳고 그름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어떻게든 많은 이가 하느님께 모여드는가의 문제이므로(루카 1,16 참조).
---「나자렛 회당 이야기」중에서
요즘 들어 사람들이 성당에 오지 않는다고, 오는 사람들 역시 예전 성실한 신앙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목소리가 부쩍 늘어 간다. 혹자는 세속을 탓하고 경계하며 돈과 물질로 타락한 사람들이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함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틀렸다. 적어도 세상은 교회를 만만하게 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교회에서 배울 것도, 나눌 것도, 논쟁할 것도 찾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더 깊게, 더 열렬히,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유하며 나누고 있다. 강도 만난 사람을 회피하며 제 삶의 자리만을 고집했던 사제와 레위인은 실은 세상에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자비와 친교, 그리고 형제애에서 소외당한 채 스스로 거룩하다 여기는 불쌍한 존재들일 뿐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중에서
부자와 라자로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하느님을 신앙하며 사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사유와 그 존재에 대한 사랑의 문제이다. 누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떤 삶에 처해 있느냐’가 첫 번째 질문이어야 한다. 구걸의 삶을 사는 것이 자기 노력의 결핍에서가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의 직무 유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 능력 있는 자와 쓸모없는 자,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의 대립 구도로 세상을 인식하는 동안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디 가치는 황폐해진다. 사람은 그 자체로 존중받고 인정받으며 더불어 사는 것에 당연한 권리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존재론적 가치에서 시작한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중에서
회개는 개인적 성찰이나 성숙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 낯선 이들을 향해 뻗어 나가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 된다. 지금의 나를 미래의 우리 속으로 던져 넣고 거기서 서로가 용서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성령에 취하는 것이 회개다. 그 회개를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례로써 확증하고 세례를 통해 폐쇄적인 ‘내’가 ‘우리’라는 신자들로 분화하여 현존한다(참조: 사도 2,41; 4,4; 5,14; 6,1.7).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이야기」중에서
신앙한다는 건, 나의 무시로 세상을 향해 퍼부은 폭력을 조금씩 사그라들게 만드는 매우 지난한 일이다. 세상 안에 늘 육화하는 예수님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라도 타인과 세상을 향한 나의 무시는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타인과 세상이 육화한 하느님의 자리라는 사실은 행복이나 기쁜 체험이 아니라 실은 수없이 아프고 힘든 체험으로 터득한 복음의 진리다. 그래서 신앙은 십자가의 길이다. 아프지만, 힘들지만 보람된 일이 십자가의 일이고 신앙의 일이다.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 이야기」중에서
신앙은 본래 낯선 것이었다. 유다 사회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신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신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습관화된 신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신앙을 전하는 데 있어서도 습관화된 신 인식이 걸림돌이 될 때가 있다. 타인의 삶에 대한 섬세한 인식 없이 제 인식의 결과물을 전하는 편리함은 때론 폭력이 된다. 누군가는 타인의 삶을 통해 그가 살아 낸 시간들의 상처를 더듬을 수 있고, 또 누군가는 그 삶이 지니는 고유한 가치를 제 삶의 교훈이나 지렛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이런 타인에 대한 읽기는 자기를 떠날 수 있는 해방의 길에서나 가능하다.
---「예루살렘 사도 회의 이야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