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의식 지도를 처음 봤을 때 그것은 집 현관에 있는 칠판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저게 무엇인가요?” 남편은 “오, 저건 의식 지도예요.”라고 하며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만들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각각의 의식 수준마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 신을 바라보는 관점, 자기를 바라보는 관점, 감정, 과정이 있어요. 도표 하나로 당신은 세상 전체를 보게 됩니다. 절망의 나락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상태까지 이르는 길을 의식 지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 주지요.” 데이비드가 설명해 주자마자 저는 의식 지도가 어떻게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알았습니다.
--- p.13
2012년 호킨스 박사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저는 박사님과 수잔에게 향후 프로젝트 목록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근육테스트를 요청드렸습니다. 목록에는 박사님 작품의 ‘입문서’가 있었고, 대답은 ‘그렇다’였습니다. 여러분이 손에 들고 있는 책이 그 의도의 실현입니다. (……) 이 책은 새로운 독자에게는 호킨스 작품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이고, 오랜 학생에게는 유익한 요약서입니다.
--- p.45
박사님의 다른 책과 달리, 이 책에서는 그분의 다양한 소통 방식, 즉 공식 출판된 저작들과 대화 형식의 현장 강연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모든 저서와 몇몇 강연 및 비공식 대화에서 발췌한 내용을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입문서 분량으로 간략화하는 방향으로 편집했습니다.
--- p.45
의식 지도 전체를 살펴보면 진화의 세 가지 국면이 드러난다. 즉 소유(havingness)에서 행위(doingness)로 그리고 존재(beingness)로의 진화이다.
--- p.130
모든 곳에 가 봤고, 모든 것을 해 봤고, 모든 사람의 얘기를 들어 봤던 이들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큰 장애물은 인과성의 원리입니다. 인과성의 원리는 모든 것이 선형적 원인과 연쇄를 가진다는, 그리고 ‘이것’이 ‘저것’을 초래한다는 설명입니다. ‘이것’이 ‘저것’을 초래한다고 믿는 한, 당신에게는 가해자와 희생자, 에고와 영, 자아와 참나가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당신은 갇힙니다.
--- p.162
병은 단지 우리 의식이 살펴볼 필요가 있는 무언가를, 우리가 죄책감, 두려움, 혹은 다른 어떤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무언가를 주목하라고 주의를 환기할 뿐이다. 우리가 품고 있는, 놓아 버려지고 취소되어야 할 신념 체계가 있다. 용서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 있으며, 사랑받아야 하는 우리 내면의 어떤 것이 있다. 그래서 그 병에 대해 스스로를 판단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 앎(awareness)으로 무언가를 가져오는 그것에 감사한다.
--- p.190
우리는 물질이 아니라 진정한 참나(Self) 경험, 즉 내면이 평화롭고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상태에 중독되어 있다.
--- p.226
“누구의 탓입니까?(who’s to blame?)” 어떤 재난을 두고 아나운서가 처음 한 말이다. 브루클린 다리가 무너지면 사람들은 묻는다. “누구 탓인가요?” 에고의 보복성은 즉각 가해자를 찾는데, 그러면 에고는 손가락질하고 복수하고 처벌하고 증오할 수 있다. 탓하기는 에고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다.
--- p.286
두려움은 생명을 오로지 육체적인 것으로 여기고, 몸이 죽는 궁극적 두려움이 함께하기에, 우리는 “그럼 뭐?(Then what?)” 기법을 사용한다. 그 기법은 어떤 두려움에도 작동한다. ‘난 내 차를 잃어버릴 거야.’라는 두려움을 예로 들어 보자. 음 그럼 뭐? ‘음 그럼 난 교통수단이 없을 거야.’ 음 그럼 뭐? ‘그럼 나는 직장을 잃을 거야.’ 음, 그럼 뭐? ‘다른 곳에는 그런 직장이 없어.’ 음, 그럼 뭐? ‘나는 돈이 전혀 없을 거야.’ 그럼 뭐? ‘난 가난할 거야.’ 좋다. 그래서 당신은 가난하다. 그럼 뭐? ‘난 굶어 죽을 거야.’ 모든 두려움 더미의 밑바닥에는 죽음이 있다.
--- p. 291
마음은 모든 사람이 집으로 떠나고 당신만이 홀로 남아 있는 거 대한 미식축구 경기장과 같습니다. 저 구석에서 조그마한 라디오가 틀어져 있는데 당신이 그 라디오에 집중하게 되면서 “여기는 시끄러운 경기장이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그 1퍼센트를 ‘나(me)’라고 여기면서 1퍼센트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마음이 시끄럽다고 여깁니다. 깨달음에 장애물이 되는 것은 마음이 아닙니다. 마음의 작용을 ‘나(me)’라고 여기는 동일시가 장애물입니다. 당신은 그것이 나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그 1퍼센트는 다양한 장치로 당신을 최면에 계속 걸리게 합니다.
--- p.325
코미디언이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 뉴에이지주의자인가요?” (잠시 멈춤) “가게에 가서 파리지옥 식물을 몽땅 사고 그 이후에는 파리지옥이 채식주의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육식성인 파리지옥에 채식주의자가 되라고 설득하고 있는 부조리함을 알아차립니다. “파리지옥, 당신은 오이 좋아하잖아. 그렇지 않아, 내 사랑? 여기 토마토 한 조각 먹어 봐!” 농담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영적 이상과 도덕성에 따르기를 바라는 에고의 순진함과 미숙함에 우리가 웃을 수 있게 도와줍니다.
--- p. 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