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밀라노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해 보라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마치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남들과 다른 개성으로 그려 보라는 듯 말이죠. “뭐라고 딱히 말할 수 없지만 그 사람은 잡히지 않는 향수 같아요.” 저에게는 밀라노가 그랬습니다. 좀처럼 마음을 보여 주지 않고 무절제한 간섭을 싫어하여 타인에게 무관심해 보이고 까칠해 보이다가도 속이 깊은 친구처럼 다가온달까요.
---「밀라노에서 보물 찾기」중에서
여기에는 여러 작품들이 눈길을 끌지만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작품인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그가 죽기 전까지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어머니 성모 마리아가 돌아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뒤에서 안고 있는 피에타의 도상이지만,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보는 관객의 각도에 따라서는 돌아가신 아들 예수님의 위치가 어머니 마리아를 오히려 업고 있는 자세로도 보입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를 안고 업으며 미완성의 조각은 완성된 사랑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 정도면 당신은 도시 밀라노를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보다 더 그리워하게 되지 않을까요.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하루면 충분하니까 말입니다.
---「밀라노에서 보물찾기」중에서
그즈음 저는 산 마우리치오 성당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당에 들어서면, 오른쪽 벽에 우선 ‘탕자의 아버지’(루카 15,20)가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줄 것 같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보다 화려한 작품들이 많지만 자비로운 이 미소를 보고 있으면 제 안의 차가운 자책감까지 사르르 녹는 것 같아 그냥 좋았습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위로는 태양처럼 아무 말 없이 다가옵니다. 폭풍 같은 삶을 담담하게 버텨 온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흔들리지 않는 미소랄까요, 닮고 싶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도 그런 사람이 곁에 있나요?
---「저는 지금 밀라노에 와 있습니다」중에서
기억이 영혼을 잠식해 갈 무렵, 근처 산 마르코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 ‘전문가’란 원래 그 분야에서 실수를 많이 해 본 사람이라고 하던데 …, 돌이켜 후회한들 머물지도 이루지도 못하고 …. 하지만 내일의 또 다른 과거인 ‘오늘’을, 그래도 살아 내야 합니다. 뜰 안에 들이치던 거센 바람이 가시자, 이어 꽃씨 하나 홀연히 손등에 앉아 말을 건네는 듯합니다. 지우고 싶은 제 못생긴 기억과 이제는 화해의 입맞춤을 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
---「그들은 왜 입맞춤을 했을까」중에서
밀라노 대성당의 두 번째 얼굴은, 비 오는 날 광장 바닥에 비친 모습입니다. 저는 비 오는 날의 대성당을 참 좋아합니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던 외국 생활에서, 광장 바닥의 고인 물에 비친 대성당의 물그림자는 그 자체로 제게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한 청년이 고뇌에 빠져 헤매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주교의 강론을 듣고 회개하게 되었답니다. 그의 이름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387년 4월 13일 주님 부활 대축일 성야에 오랜 방황을 끝내고 그가 세례를 받았던 바로 그 성당 터 위에 지금의 밀라노 대성당이 세워졌습니다. 대성당 지하에는 성인이 세례받은 세례대가 아직 보관되어 있습니다.
---「세 가지 얼굴의 대성당」중에서
성당 유리화의 아름다운 빛 때문일까요. 산 크리스토포로 성당은 소박하고 아늑한 엄마 품을 닮아서 그런지 특히 혼배 미사가 많은 성당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성당의 제대 배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에는 우리가 잘 아는 하느님, 천사들 그리고 마르코 복음사가를 나타내는 날개 달린 사자의 형상 등이 있는데, 신기하게 전설의 동물 유니콘도 그려져 있습니다. 하기야 유럽 어린이들은 곰 인형보다 유니콘 인형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머리에 긴 뿔을 가진 전설의 유니콘은 염소의 수염, 당나귀의 꼬리 그리고 두 갈래의 발굽으로 르네상스 화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행운의 상징이기도 한 유니콘은 날카로운 긴 뿔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힘으로 어떠한 사악한 독도 해독할 수 있는 치유력을 지녔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런 전설의 유니콘이 성당에 왜 그려졌을까요.
---「유니콘을 품은 성당」중에서
1930년대 밀라노에서 활동했던 화가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 1899-1968년)는 빈 캔버스에 단지 칼로 죽 긋기만 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당시 그림을 본 이들은 실망하며 야유를 보냈지만 그는 캔버스 ‘틈’을 통해,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무한’을 탐구하고자 하였습니다. 불안한 존재의 고뇌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함을, 어찌 ‘보이는 것’에만 의지하여 답할 수 있을까요. 익숙하게 정렬된 일상의 틈을 찢고,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신비를 향한 손짓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제게는 ‘물음’이 그래 왔습니다.
---「길 위의 길에서」중에서
세상에 ‘아름다운 고통’이란 게 있을까요. 돌아보니 아름다웠던 건 아닐까요? 작가 에기노 바이너트는 ‘성모님의 고통의 길’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열 살 때부터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바라고, 열네 살에 독일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하여 깊은 수련과 기술을 익혔던 수도자, 독일에서 불던 나치의 광풍으로 군에 징집되었지만, 히틀러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어야 했던 청년, 전쟁 중 부상으로 오른손을 잃고 사랑하는 삶이었던 수도원에서도 퇴회해야 했던 사람, 그리고 전쟁 후 황폐한 상황에서 거리의 구걸로 연명해야 했던 작가. 그에게 사라진 건 오른손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향했던 그의 길이었습니다. 다시 왼손과 가슴팍으로, 때로는 떨리는 호흡과 영혼 깊이 자리한 신앙을 조각과 칠보 기법으로 창작해 내기까지 그는 고통스러운 방황을 거듭해야만 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중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에 의해서 폐허가 된 성당에서는 부서진 십자가가 발견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지요. 교회의 성미술 안에서 예수님의 손은 ‘기쁜 소식의 선포’를 의미했기에, 보이지 않는 그의 양손은 새로운 의미를 가집니다. 14세기부터 플랑드르 지방에는 ‘그리스도는 손이 없습니다’라는 익명의 시가 전해집니다.
그리스도는 손이 없습니다/단지, 오늘날 그분의 일을 수행할 우리의 손밖에는
그리스도는 발이 없습니다/단지, 사람들을 그분의 길로 인도할 우리의 발밖에는
그리스도는 입술이 없습니다/단지, 오늘날 사람들에게 그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우리의 입술밖에는/ 그리스도는 도움이 될 방편이 없습니다/단지, 오늘의 사람들을 그분께 인도할 우리의 도움밖에는/ 우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읽는 성경이며 말씀과 행적으로 쓰신 하느님의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양팔 없는 십자가」중에서
근데 노을 지는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촬영하며 저녁마다 열렸던 나보나 광장의 야시장을 가기 위해 수차례 건넜던 천사의 다리에서 저는 불현듯 궁금해졌습니다. ‘왜 천사들은 저 다리 위에 머물렀던 것일까요?’ 이 조각상들은 이미 존재했지만 저에게는 그동안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원래 1535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다리 양쪽에 성경의 인물들을 세우게 했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 모세의 조각상까지. 그러다 오늘날 교황님이 축복하시는 자리인, 바티칸의 이중 타원형 광장을 만든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에게 다리 위의 조각상들을 교체하는 소임을 맡겼습니다. 그때부터 ‘천사의 다리’는 고통과 슬픔을 지니게 되었지요. 다리 위에 머문 열 천사들 중에 ‘명패를 든 천사’와 ‘가시나무 관을 든 천사’는 그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베르니니는 슬픔이 가득한 천사들이 죽음의 길을 걷는 예수님과 함께하길 원했습니다.
---「천사가 머문 다리」중에서
사랑을 원했지만 사랑을 몰랐던 사람들, 그러나 과연 그들만 그럴까요. 질투도 분노도 시간과 함께 사라져 골동품보다 못한 우리 인생은 어떤가요. 사랑도 하느님도 그에 관한 고집만 믿으며 살았던 건 아닐까요? 그들은 ‘사랑’이라고 말했지만 질투를 품었고 소유할 수 없는 성녀를 조롱했으며, 강요하고 굴복시키고자 했습니다. 성녀를 통해 무엇을 보았기에 그토록 무너뜨리고 싶었는지. 혹시 자신들이 세상에서 회피하고자 했던 그 너머의 ‘영원’을, 오히려 그녀 안에서 발견했던 건 아닐까요.
---「로마의 아녜스」중에서
이때 암브로시오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이 그려진 성화가 덮여 있던 천이 걷히며,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300명의 신자들 앞에 드러났습니다. 기적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인지 스스로 움직인 성모의 기적 이후, 밀라노에서는 전염병이 순식간에 물러났습니다. 제대 왼쪽에 위치한 암브로시오의 성모 마리아를 보는 순간, 저는 불교의 미륵보살상에서 느끼던 은은한 동양의 미소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염화미소拈華微笑라 했던가요. ‘말하지 않아도 너의 고통을 나는 안다.’고 암브로시오의 성모는 향기로운 마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고통에 빠진 이들과, 그 곁에서 묵묵히 지켜 내고 있는 이들을 위해 … 저는 암브로시오의 성모를 보며, 기도가 아니라 기적의 약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미소와 눈물의 성모」중에서
제대 뒤편으로 이어진 원형의 회랑으로 들어서자, 끝자락 벽면에 영원한 새로움을 간직한 「기다림의 성모」 이콘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월을 견딘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인간적인 기쁨과 머뭇거림으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두렵지만 설레는 표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벽에 그려진 생각보다 소박한 색채의 이미지는 겸손한 모습으로 다가와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었기에 이를 본 사람들은 ‘출산의 성모’ 또는 ‘기다림의 성모’라고 했답니다.
---「미소와 눈물의 성모」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