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독일에서 휴대폰 신호가 끊기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내가 야무지지 못했구나, 하고 즉시 깨달았다. 차 안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지만, 몸은 땀으로 흥건해졌다. 미하엘이 그런 내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를 믿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신용했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보다 힘이 세고 몸집이 큰 남성인 미하엘과 그의 ‘아내’ 케시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할 참이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내 몸을 지킬 수단을 잃은 채,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는 심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차에서 내리는 선택지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보다 훨씬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p.47~48
동물해방론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피터 싱어PeterSinger는 2001년에 미국 웹 매거진 〈너브닷컴Nerve.com〉에 ‘진한 애무Heavy Petting’라는 제목으로 논고를 발표했다. 싱어는 잔학한 행위를 동반한 동물과의 섹스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도, “하지만 동물과의 섹스가 항상 잔혹함을 동반할 리는 없다. (중략) 때로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 만족하는 성행위로 발전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라고 썼다. 폭력 행위를 동반하지 않는 한 동물과의 성적인 접촉이 용인될 수 있다고 해석될 만한 싱어의 주장은, 그 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비판적인 의견이 제기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pp.52~53
“태어나면서부터 주파일”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12명이고 전부 남성이었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내가 만난 사람들 중 60퍼센트가 태어나면서부터 주파일이었다고 느낀 셈이다. 남성만 계산하면 17명 중 12명으로 비율은 70퍼센트까지 높아진다. 참고로 지금까지 만났던 여성 주파일 가운데 “태어나면서부터 주파일”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타고난 주파일이라고 느끼는 남성들은 “섹스의 의미나 방법 등 성과 관련된 지식이 없었던 어린 시절부터 동물에게 강한 애착이 있었다.”라거나, “유소년기부터 사춘기에 걸쳐 자신의 성적 지향을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이구동성으로 “동물을 향한 애착이나 성적 욕구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미리 갖춰진 감각”이라고 했다.
--- p.55
불현듯 질문이 떠올라 나는 물었다.
“저기, 미하엘, 이 소들을 섹시하다고 느껴요?”
“아니요.” 그러고는 미하엘은 조금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혹시 관계가 가까워진다면, 한 마리 한 마리의 ‘퍼스낼러티personality’가 느껴진다면, 달라질지도 모르지요.”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미하엘은 말을 이었다.
“동물에게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퍼스낼러티가 있어요. 퍼스낼러티는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아요. 나와 그 동물이 느긋이 함께 지내다 보면 퍼스낼러티를 알 수 있어요. 예를 들면 나에 대한 동물의 반응 방식이랄까, 그런 것들로부터 보이는 거죠.”
미하엘뿐만 아니라 많은 주파일이 “동물에게는 퍼스낼러티가 있다.”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좀처럼 그 의미가 다가오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아무리 동물을 사랑한다고 해도, 어떤 동물이든 좋다는 의미일 리가 있겠냐고 말한다.
--- p.72
“섹스를 화제로 삼아야 센세이셔널하니까, 대부분 주파일에 관해 이야기할 때 성행위에만 한정해서 다루곤 해요.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동물이나 세계와 맺는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예요. 무척 어려운 문제지요. 세계나 동물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가에 관한 논의니까요. 주파일을 비판한다는 것은 다른 종을 향한 공감이라는 중요한 감각을 비판하는 셈이죠. 누구를 사랑하는가, 무엇을 사랑하는가, 그런 것을 두고 타인에게 간섭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샤가 열변을 토하는 사이에도 쥐들은 감자를 담은 그릇에서 뛰놀았다. --- pp.85~86
일본에서는 개를 기르는 많은 사람이 중성화 수술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주인의 의무라는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중성화는 동물의 성을 컨트롤하는 것으로, 그 생명이 가진 존재 양상에 인간이 손을 대는 것이다. 중성화의 찬반에 대해서는 더 논의할 필요가 있겠지만, 개의 성을 무시하고 거세하는 일이 일반적이게 된 배경에는 ‘개를 아이로 보는 시각’도 자리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는 어른의 지배 아래 있으므로 어른이 권한을 내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일반적으로 아이는 어른과 같은 성욕을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되므로, 중성화 자체가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중성화하면 개의 ‘아동화’는 한층 더 진행된다. 아이가 성욕을 드러낸다는 공포에서 ‘어른’ 주인은 해방된다.
--- pp.105~106
“주파일이라는 존재를 알지 못했다면 내 삶은 훨씬 지루했을 거야.”
쿠르트는 자신의 삶을 즐기면서 주변의 가까운 사회부터 바꾸려는 듯하다. 그 생각의 근저에는 그가 강하게 믿고 있는 ‘섹슈얼리티의 자유’가 있다. 주파일이 ‘되어가는’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주파일이었던 사람과는 다른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다. 어떤 이에게 주파일이라는 존재는 가까운 동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며, 어떤 이에게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연인이나 개를 수용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또 어떤 이에게는 정치적 활동이기도 하다. 주파일은 섹스와 결부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동물, 인간, 사회, 이 모두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던져진 질문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쉽사리 끝날 수 없다.
--- p.233
미하엘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동물은 내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줬지만,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그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때에 맞는 역할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존재할 것. 거짓말을 하지 말 것.” 미하엘은 말을 사용하지 않고 동물의 마음을 읽어내려는 바람을 이루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미하엘은 동물 앞에서 주인이라는 역할을 연기조차 할 마음이 없다. (중략)
어쩌면 주파일은 시적 감각이 풍부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언어로 전해지지 않는 동물의 부름에 응하면서, 자신의 감각을 세련되게 다듬어간다. 그리고 파트너 동물과의 사이에서만 보이는 특별한 표식을 실마리 삼아 서로의 관계를 풀어나가고 있다.
--- p.244
상대방을 객관적으로만 보는 투명인간은 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친구’였던 것이다. 수없이 흔들리면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머리를 파묻은 채, 오로지 자신을 위해 연구하려 했던 나라는 존재가 부끄럽고 미안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객관적이고자 했던 불손한 생각 때문에도 울었다. ‘섹스를 말할 자유’를 위해서 힘을 보태주었던 그들을 통해 나는 앞으로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을 다 쓴 지금도 망설임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나와 주파일 한 명, 한 명과의 사이에 각각의 퍼스낼러티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그 사실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 눈앞에 ‘특별한’ 인간들이 있다. 그리고 퍼스낼러티를 발견하려는 실천 자체가 형태가 있는 ‘사랑’이 아닐까? 그런 기대를 품는다.
--- p.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