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의 호랑이’와 인연을 맺은 지 20여 년, 필자 또한 그분의 득도(得道)나 인가(印可)에 관하여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성철 스님께서 당시 한반도 선지식들에 대해 거듭 실망한 끝에 누구에게서도 인가를 구하지 않았던 점에 대해 고찰할 때 테크닉에 있어서는 종교학 방법론에서 사용하는 환원주의적(還元主義的)이고 분석적인 방법을 채택했다. 즉, 종교학자들이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의(定議)하기 위해 ‘그것의 부재로써 종교가 성립되지 못하는 바로 그것’을 찾아 가듯, ‘그것이 없을 때 성철 스님의 생애 및 전서가 성립되지 않는 바로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져 왔다. 그리고 20여 년간 연구한 끝에 그것은 바로 ‘성철(性徹)’이란 법명의 의미, 즉 불성을 철저하게 이룬 사람이라는 뜻에서 드러나듯 ‘그 자체로 사람들을 일깨워 주는 철두철미(徹頭徹尾)한 힘(awakening power)’이라고 결론지었다. 참으로 ‘불성을 철저하게 깨치게 하는 바로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필자를 비롯한 모든 중생과 피조물들이 깨달아서 살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생로병사의 이치를 깨닫고 자비를 베풀면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p.9
성철 스님은 불교 창립(創立)의 근본 패러다임인 깨달음을 극단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인물로서, 모든 불자가 불교의 근원(根源)으로 바로 들어가기를 주창(主唱)했다. 그분의 일생과 전서의 초점이 오로지 그것에 맞추어진 것도 명백한 사실로써, 그분은 자신이 수행했던 ‘간화선을 통한 돈오돈수적인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장했다. 반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돈오돈수적 패러다임이 아주 명확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오로지 창시자에게만 국한(局限)되어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모두 다 돈오점수의 과정을 따라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자(佛者)인 지눌도 이와 똑같은 결론(結論)을 내고 일반적인 중생들을 위한 돈오점수의 과정을 제공하였다. 그러면서도 만년(晩年)의 지눌은 대혜종고의 어록을 읽으며 간화선을 접견했고 이후 상근기(上根器)의 수행자들에게 그 사상적 유산(遺産)도 남겨 주었다.---p.91
성철 스님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혜능과 당신을 동일시했던 경향이다. 《돈황본 육조단경》에 나오는 혜능이 읊은 게송에 대한 성철 스님의 해석으로 미루어, 그분이 자신을 육조혜능과 완전히 동일시했던 것은 아닌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즉 “유전돈교법 출세파사종(唯傳頓敎法 出世破邪宗)?오로지 돈교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아가 삿된 가르침을 부수어버려라.” 그러나 성철 스님은 《돈황본 육조단경》이 언급하는 돈점의 포괄적 내용을 소홀히 하였던 것 같다. 예컨대 “아자법문 종상이래 돈점 개립무념위종(我自法門 從上已來 頓漸 皆立無念爲宗)?예부터 나의 법문의 돈점이 모두 무념을 종으로 한다.”
성철 스님은 여기서 “頓漸”이 잘못 들어간 글자라고 하면서 이렇게 번역했다. “나의 법문은 예부터 모두 무념을 세워 종으로 삼는다.” 성철 스님의 번역에서 이러한 선택은 어느 정도 존경받을 만하지만, 《돈황본 육조단경》을 번역한 한국학자 가운데 그분을 따르는 스님을 제외한 이들 모두가 그 두 한자를 그대로 살려서 옮긴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p.177
성철 스님은 1987년 출간한 《돈황본 육조단경》의 현토&편역이 무엇보다 한국불교 개혁에 온전히 바친 자신의 생애와 전서에 월계관을 씌우는 것이길 원했겠지만, 결국 보조지눌사상을 선호하는 많은 불교학자 및 불자에게는 해인사가 한국불교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육조혜능의 권위를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시도한 것처럼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성철 스님의 사상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그분이 주창한 돈오에 관한 수사법(rhetoric of immediacy)은, 역사의 제약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 오히려 돈오에 관한 이 수사법은 아주 정확한 정치사회적 좌표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지금까지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너무도 비타협적이어서 한국불교를 양분할 정도인, 성철 스님 사상의 전체를 두루두루 관통하는 돈점의 대립 관계는 귀납적 사고와 대화를 배척하는 반공산주의에 입각하여 절대적 정권을 세웠던 쿠데타들을 강하게 상기시키게끔 한다. 성철 스님의 공생활 기간이 독재정권의 기세가 올라가기 시작한 지 몇 년 후에 처음 이루어져, 그 정권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도 있다. 성철 스님은 입적하던 1993년까지 종정과 방장의 중책을 유지하였으나 구체적인 활동은 1987년 멈춘 것으로 보인다.---p.181
There is no doubt that T’oeong S?ngch’?l was an exceptionally great monk (Senecal 2012a, 52~53); nevertheless some aspects of his legacy are definitely controversial. History will not forget, for instance, his silence at the time of the 1980 Oct. 27 crackdown and at the peak of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in 1987. Accordingly, the best way to transmit an authentic image of him to posterity may be to acknowledge those aspects instead of trying to deny or justify them. To be sure, he was connected to the polity, but obviously not in the way some of his followers would like future generations to believe. His hermeneutics of Buddhism, i.e. his interpretation of the tradition in the second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thoroughly reflects a pre-democratization spirit, not a post-democratization one. As we celebrate the 25th anniversary of Korean democratization, it could be of the utmost importance when envisaging the future of the Korean peninsula, of Korean Buddhism and of the worldwide propagation of Keyword Meditation, to keep in mind the socio-political context in which the contemporary Korean sudden/gradual debate was born and which it reflects.---pp.238~239
수행의 여정에서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만일 전통적인 수행법들이 현 상황을 직시하고 역동적으로 변해 가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 적극적으로 서로 교류하면서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면서 끊임없이 새롭게 거듭나지 않고 수행모임 간의 소통 없이 제각각 독불장군 식으로 “우리만 정통이야!”라고 외치며 옛날식의 전통만을 고수하려 한다면 곧 외면당하고 뒤처지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은 무문혜개 선사께서도 《무문관》의 자서 가운데 게송에서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라면 그 많은 길 가운데 끊임없이 새롭게 단장하고 보수 관리도 잘 되는 새 길을 택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황폐해진 옛길을 택하겠습니까?
점수(漸修)가 맞고 돈오(頓悟)가 틀리다고 우기건
동전 앞뒷면 가운데 하나일 뿐!
돈오(頓悟)가 맞고 점수(漸修)가 틀리다고 우기건
모두 그릇된 논쟁일 뿐!
---pp.245~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