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지 일 년도 안 됐을 때 아빠의 단골 카페 사장과 결혼을 선언했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빠의 죽음이 농담이 아니었듯이 엄마의 재혼도 농담이 아니었다. 어어어, 하다 보니 새아빠, 브랜든과 한집에 살게 됐다. 아빠가 자주 앉아서 움푹 들어간 소파 자리엔 이제 브랜든의 재킷이 놓여 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던ㅡ아니, 인지하지 못했던ㅡ우리 집에 브랜든이 내린 커피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에게 커피란 브랜든 그 자체가 됐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모든 게 달라진 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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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아빠가 길을 잘못 들어 런던 커피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아빠를 그리워하며 런던 커피에 갈 일도 없었겠지. 그럼 브랜든이 엄마를 위로해 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빠가 생전 안 하던 산책을 하고, 생전 안 잃어버리던 길을 잃어버려 런던 커피까지 오게 된 건 운명일까? 그럼 아빠가 죽은 건? 엄마가 브랜든과 재혼한 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따위 운명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어떤 우연은 인생을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이끈다는 생각은 커피 냄새처럼 내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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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돌아가신 지 일 년 만에 엄마가 재혼했고, 나는 그 슬픔에 취해 있어야 하는데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는 게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자기 취향의 이성을 보면 눈이 돌아가는 게 사람의 본성이다. 그럼 슬픔은? 슬픈 와중에도 똥을 싸고 학교를 가고 밥을 먹고 이성을 보며 침을 흘린다. 그렇다면 슬픔도 별것 아닌 거 아닐까? 내가 너무 슬픔을 확대해석하는 걸 수도. 그런데 나 정말 슬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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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엔 말이야.”
여자가 따라 일어섰다.
“브랜든이 사기꾼이 아니란 걸 너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 아니야?”
“아니요, 아닌데요? 브랜든은 사기꾼이에요! 그 새끼는 사기꾼이라고요!”
마지막에 소리를 빽 질렀다. 가게 안에 사람이 많았고 그들이 모두 나를 쳐다본다는 것도 알았지만, 목소리가 제멋대로 나갔다. 순간 카페 안에 있는 커피들이 나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냄새로 나를 거미줄처럼 옭아매는 듯했다. 내가 벗어나려 할수록 거미줄은 나를 더 감아왔다.
벗어나야 해, 벗어나야 해.
그러나 나는 안다. 벗어날 수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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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컴한 밤, 땀이 날 정도로 골목길을 뛰니 가슴이 후련했다. 내가 살았던 골목골목을 지나 아빠와 함께했던 골목, 재범이와 함께했던 골목, 그리고 브랜든의 카페가 있는 골목을 지났다. 아빠와 함께했던 골목을 지날 땐 아빠가 바람이 되어 나와 함께하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이 골목들이 그대로일지 모르겠지만, 먼 훗날에도 이곳을 달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마음속에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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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브랜든이 고개를 저었다
“아, 왜요?”
“똑같아서.”
“뭐가요?”
“……너랑 네 아버지랑. 그 자리, 네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자리였잖아. 젠틀하셨어. 나를 존중해 주는 기분이었어. 왜, 그런 손님들 많잖아. 내가 돈 냈으니까 너는 커피나 내려라, 그런 거. 근데 네 아버지는 내가 커피 내리는 모습을 한 장면도 안 놓치려고 하셨어. 그럼 막 내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 그래서 네 아버지 오시면 원두도 더 신경 쓰고 그랬어.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커피를 드려서 다행이라고, 아직도 생각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브랜든이 아빠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고, 무엇보다 아빠 이야기를 먼저 꺼내서 놀랐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나를 비롯한 아빠를 아는 모든 사람은 아빠에 대해 말하길 꺼렸다. 상처였기 때문에 밴드를 붙인 후 모른 척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처에는 공기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몰랐다. 가끔은 약을 바른 후 밴드를 붙이는 대신 공기를 통하게 해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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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네가 지금의 커피 냄새를 이겨 내도 어디선가 또 다른 커피 냄새가 불어올 거야.”
“무슨 소리예요?”
브랜든이 다 내린 커피를 고양이가 파란색 물감으로 그려진 도자기 잔에 따랐다.
“내 이야기를 하는 거야. 뭔가를 극복한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 만약에 그걸 극복했다고 해도 또 다른 시련이라고 할까, 그런 게 찾아오기도 하고. 인생이 그래.”
“거창하네요.”
“거창한 게 아니야. 내가 인생을 더 살았다고 거들먹거리는 것도 아니고. 커피 냄새 같은 걸 늘 가지고 다니는 게 인생 같더라고. 그건 절대 없어지지 않아. 없어진 것 같더라도 조금만 방심하면 뒤에서 슬쩍 나타나서 나 여깄어, 하는 거지. 나도 그런 거 있어. 커피 냄새 같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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