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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의 영혼들
탕의 영혼들

탕의 영혼들

[ 초판 한정 어나더커버 ] 창비시선-488이동
손유미 | 창비 | 2023년 04월 14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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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4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172쪽 | 242g | 125*200*20mm
ISBN13 9788936424886
ISBN10 8936424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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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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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화로워라

(…)

우리는 알지 우리에게 또다른 태양이 남아 있다는 걸 내일도 내일의 내일의 내일이라도 따듯한 기운을 채워줄 붉고 둥근 불운

아닌 것들이
있어 그런

생각을 하면 허리가 곧추선다 목이 길어지고 잘 씻은 청포도알처럼 이마가 깨끗해진다 우리

평화롭지? 평화로워라 우리 평화롭지? 안전하다 대수롭지 않다 의연하다 나란하고 가지런하다 카세트테이프처럼 보리냉차처럼 우양산처럼 식물원처럼 채광처럼 소포처럼 뜰처럼 우리 좋아하는 말들을 반복해서 걸어나갈 때 별안간 주위를 채우는
---「모두 모여 태양 모양」중에서

목욕탕에 가고 싶은 마음과

목욕탕에 가야 하는 몸을 살뜰히 모은다 위기의

순간을 앞둔 주인공에게 친구들이 선한 기운을 모아주듯이 그리하여 악당이라는 세력을 물리치고 행복한 결말 모두 활짝 웃으며 달려나가는 그런 결말이 내게는

목욕탕

목욕탕에 있다

대욕탕과 쑥탕
게르마늄 온천과 쑥탕
온탕과 쑥탕
해수탕과 쑥탕
잠깐 열탕 잠깐 냉탕 쑥탕을

오가며 풀어놓은 나의
이완된 근육들 그리고

제 뼈에 그걸 붙이고 다시 일어나는
탕의 영혼들

나는 불은 때를 밀고
영혼들은 제 뼈에 내 근육을 다진다

나는 없애고
영혼들은 불린다
---「탕의 영혼들」중에서

잠은 움직임의 서랍
잠은 움직임의 기쁨

(…)

온 잠을 다 누리고

잠으로 무한 목욕을 한 후

누적된 피로와 권태 관절의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겠지 바라니 바라나니 이 잠 이후에 나는 지난날의 실례와 책망 좌절로부터 무관한 새 몸이 되기를

새 옷만큼 기쁜
새 몸 갖기 그러나
---「수면 장소」중에서

신이 멀어
귀신의 손을 잡는다

아름답지 못할 바엔
잡귀가 되는 게 낫다

침묵의 사랑을 무시했던
옛날이야기는 다시 쓰여야 한다

말하지 않음은
기도가 저주임을 일찍 알아버린 탓이었다

탯줄로 자라지 못하고
미움을 먹고 자라 그랬겠다
---「수의(壽衣) 같은 안개는 내리고」중에서

사랑이 망할 때마다
녹지 않는 눈이 내려

하늘의 살을 덮고
오래 잔다

꿈속에선 아무 잘못이 없어
이마를 내놓고 놀고

하늘에선, 내가 나를 포기하는 속도와 상관없이
눈이 계속 내리고

(…)

가망이 없어 사랑이 망하는 걸까
사랑이 망해서 날 망치는 걸까
---「그런 눈」중에서

나를 드나들 수 있는 문은 하나는 아니다 열몇개는 된다 폐쇄 폐쇄 폐쇄 폐쇄……를 거듭했음에도

(…)

몇겹의 어둠 뒤에서도 빛나는 불빛처럼 수십의 사람들 속에서도 빛난다 틀어막고 싶은 마음은 또다시 폐쇄 폐쇄 폐쇄 폐쇄……를 거듭하고 싶어라

영혼이 우세한 세계가 오면 모두가 앞다퉈
몇근의 근육을 버리고 몇 리터의 뜨거운 피를 쏟아내겠지
---「령 영 넋」중에서

시간이 흘렀다 내내
나는 혼자였다 하지만

때때로 그 표정을 읽고
용기를 얻어

네 고요가 그렇게 약할 리 없다
그러니 일어나 할 일을 하렴

내 고요가 이렇게 약할 리 없다
그러니 일어나 할 일을 하자

어느 날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모를
고요를 기다리며
---「고양이 담벼락」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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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뜰하고 귀엽게, “옹심이 같은 이웃 사람”(「팥알만큼이나 팥알만큼이나」)을 떠올리고 ‘인심’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자갈자갈하며 달그락거리는 이 영혼들의 시편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이든 할 수 없을 것 같나. 다만 느낄 수 있다면 좋을까. 이 기척과 기미와 서서히 스며드는 선한 기운 혹은 알맞은 근육과 뼈 같은, 수런거림의 시를. 그 시 속에 참 많이 구불거리며 펼쳐져 있는 시간들을. 손유미의 시는 시간을 하나하나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이 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읽는 누군가는 “잘 씻은 청포도알처럼 이마가 깨끗해”(「모두 모여 태양 모양」)지기도 할까. 시간을 잘 살아내는 시를 어쩌면 ‘긍지’라고 여겨도 좋을까. “내 고요가 이렇게 약할 리 없다”(「고양이 담벼락」)라고 쓰는 어떤 ‘우뚝’ 같은 시. 그의 시에는 외따롭고 단단한, 용기의 리듬이 있다. 그 리듬은 주위를 잘 살피면서 흐른다. 그 흐름 속에서 어느 순간마다 나는 시를 읽었는데, 마침 잘 때가 되어 “움직임의 서랍”과 “움직임의 기쁨”(「수면 장소」)인 잠을 자면서는 꿈을 꾸기도 하고 꿈 없이 일어나기도 하며, 생활했다. 그것이 좋았다.
- 안태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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