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친구가 보름이라고 불러서, 대접 잘 받고 부끄러운 마음만 안고 왔다. 집에 도착해서 친구에게 글 보낸다. “…대접만 잘 받고 그냥 와서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글 쓰려고 앉았는데, 친구가 주워놓은 마른 꽃잎들이 생각난다. 그 댁 거실 창가, 꽃기린에서 떨어진 빨간 점 같은 꽃잎들을 모아 자그만 통에 담아놓았다. 친구가 말한다. “이 마른 꽃들이 얼마나 예뻐요. 너무 색이 곱잖아요. 아까워서(?) 못 버려요.”
‘떨어진 꽃들이 예뻐서 담아놨다’는 친구의 마음. 사시사철 피는 꽃기린 꽃말 ─ 줄기에 돋아난 가시 때문일까?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 사철꽃, ‘예수님의 꽃’이라고도 불리고. 사철 핀다고 ‘사철꽃’이라고도. 얼마 전, 꽃기린 가지 꺾어 물에 담가뒀더니 하얗게 뿌리 내렸다. 그걸 오늘 화분에 심는다. 그리고 내 마음 밭엔 꽃기린 꽃말을 심는다. 그 꽃말은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
나도 고난의 깊이를 간직한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고난의 깊이를 간직한 사람」중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다시 읽고 있다. 번역자의 말을 옮긴다. “…그 중에서도 최후의 대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는 도스토옙스키의 종교, 예술, 사상을 총 집약한 그의 창작의 ‘예술적인 성서’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점차 교양의 필수 조건으로 되고 있는 이 한 권의 소설은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지적(知的)인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는지 모른다. 이유는 이 소설이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와 인류 공동의 불변의 진리에 해답을 주기 때문이다…”
그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다시 읽다가 전에 읽을 때, 간과한 놀라운 구절이 있다. 둘째 아들 이반과 셋째 아들 알로샤가 주고받는 대화다.
이반 ─ “(…)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한다면, 그 본인은 그 앞에 나타나면 안 되는 거지. 그 인간이 조금이라도 얼굴을 나타냈다면 사랑도 그것으로 끝나고 마는 거야.”
알로샤 ─ “거기 대해선 조시마 장로님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님도 역시 ‘인간의 얼굴’은 사랑의 경험이 얕은 많은 사람들에게 흔히 사랑의 장애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인류 속에는 많은 사랑이 깃들어 있어요. 거의 그리스도의 사랑과 같은 것도 있지요. 이것은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어요, 형님.”
사람의 얼굴을 직접 보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눈이 아름답게 내리는 내 젊은 날, 나는 연인(남편) 만나러 나갔다가 갑자기 몸이 아프다고 금방 헤어졌다. 사실 몸이 갑자기 안 좋았으니까.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그가 눈보다 안 아름다워서… 이게 이유다.
‘사랑은 한 꺼풀 씌운 환상이다.’는 말처럼, 사랑은 환상처럼 허무한 것인가?… 인간의 사랑은 허무할지라도 하나님 사랑은 영원불변이시다.
---「‘예술적인 성서’라고도 불리는 소설」중에서
오늘은 오빠 부자와 남편이 피서여행 가는 날. 오전 9시쯤 조카 차가 우리 아파트 앞으로 오기에 나는 남편을 준비시킨다. 이럴 때, 아내는 남편의 어머니다. 고령의 남편이 친정의 신사 오빠와 젊은 엘리트 조카와 같이 여행 가는데, 아내 마음은 아들 수학여행 보내는 심정이다. 남편이 오빠나 조카에게 무례하지 않고 즐겁게 지내다 와야 할 텐데… 이른 아침을 끝낸 뒤, 남편 옷차림이 궁금해서 묻는다.
“오늘 무슨 옷 입을 거예요? 산뜻한 티 차림으로 가시지, 무더운 날 옆에 누가 덥게 입고 있으면 동행한 사람이 보기만 해도 답답하고 더우니까요.”
“티를 입으면 지갑이나 휴대폰 넣기가 마땅찮다고.”
‘아 남편에겐 입을 만한 여름 점퍼가 없구나… 있긴 있다. 오래 됐지만 아직도 코발트 빛이 살아있는… 그런데 왜 남편은 점퍼 하나도 안 사고 아내가 얻어다 주는 거나 입고 다니지?… 가난 만드는 아내 뒷감당하느라 그런가? 남편 점퍼는 아내가 사주는 건데, 내가 그런 일 못 해서 그런가?…’
생각이 많아진다.
남편이 가려고 나오는데 코발트색 점퍼도 아니고 그가 아껴 입는 올리브그린색 남방차림이다. 코발트색 점퍼가 아니라 실망스러우나, 올리브그린이 젊어도 보이고 단정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내가 어디서 얻어온 것. 격려 차원에서 남편에게 한마디 한다.
“당신 참 산뜻하네. 단정하고 핸섬한데… 당신은 뭣을 입든 멋있어. 체격이 좋으니까.”
여행 가면서 남방을 입든 점퍼를 입든, 헌 점퍼, 고급 점퍼든 그게 무슨 소용 있으리오. 옷차림 보고 사람 평가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소신대로 허름한 옷 입는 것도 개성이라면 개성, 멋이라면 멋. 옷차림에 민감하면 민감한 대로 무관심하면 무관심한 대로, 다 괜찮다. 옷차림에 무심한 사람은 상대방에게도 무심함이란 안정감을 준다.
---「코발트색이 어울리는 남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