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심리사가 주는 물은 동점심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오면 짠해서 어떻게 검사해요?”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물음을 들으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의아하다. 앞의 이야기와 역설적으로 들리기도 하겠다만 분명 다른 이야기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서는 심리검사를 할 수 없다. 심리사로서의 태도는 동정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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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사로 살아가는 데 정도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수련받지 않은 심리사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대학원에 가지 않거나 수련받지 않고 임상심리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틀렸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 구조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들도 엄연히 심리학과 전공자들이다. 내가 그들의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함부로 깎아내리지 말자. 이것에 의문이 생겨 반기를 들고 싶다면 그들이 아니라 사회로 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조화롭게 활동할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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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범죄와 관련이 없는 곳을 근무지로 선택해도 교도소에 수감 중인 상태로 심리검사를 받기 위해 나오는 이들도 있고, 곧 일을 저지를 것 같은 험한 이들이 내원하기도 한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가 보고 싶은 유형만 만나고 살 수는 없는 것이 임상심리사의 운명이다. 그러니 환자를 만날 땐 증상을 가진 환자로서 볼 수 있는 자세를 키우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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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받을 때 주변의 시선은 차가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전선에서 생활하고 있던 같은 과 출신의 친구들은 한심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밥 벌어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급 수련이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동기들의 우려와는 반대로 내 수련 시간은 잘 흘러갔다. 수련받고 나니 나에 대한 만족감도 올라갔다. 직업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내 전공을 사랑하고 아끼며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불끈 솟아올랐다. 모두 다 좋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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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 보고서는 보통 환자의 인적 사항, 의뢰 사유, 행동 관찰, 검사 결과, 종합, 진단적 제언, 치료적 제언, 검사자 사인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풀어가는 방식은 누군가는 검사별로 해석하고 누군가는 단답형으로 하고 누군가는 종합형식으로 쓰는 등의 차이가 있겠지만 본질은 같다. 바로 치료로 가기 위해 진단하고 제언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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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동에 심리검사를 하러 갈 때면 십 년 넘게 검사 도구를 묵직한 가방(007가방이라고 부릅니다)에 넣어 다녔다. 그러다 한 임상심리사가 검사도구만 달랑달랑 들고가는 것을 보고, 나도 가벼운 천 가방에 들고가 보았다. ‘왜 진작 여기에 안 들고 갔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벼웠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내 팔은 가벼운 데 반해 마음은 무거워졌다. 검사 가방의 무게도 견디지 못하고 환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 꼭 내 마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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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인 채 심리검사를 진행하는 도중 입원 병동에 있던 환자가 나를 위협하고 책상을 때려 부술 듯이 내리친 적도 있었다. 역시 아이를 가진 상태로 감염 병동에 들어가서 검사를 진행한 적도 있다. 환자가 나의 신체에 해를 입히지도 않았고, 감염이 되지도 않았으나 아이를 가진 엄마로서 최전선의 경험을 하는 건 언제나 반갑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건 하나의 믿음 덕이다. 나쁜 일 속에서도 좋은 일의 씨앗이 자랄 수 있다는 믿음. 이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힐 이는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 믿는다. 두려움 속에서도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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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적한 환경, 이로운 근무 시간, 넉넉한 월급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곳을 버텼다. 왜 나는 이곳에서 임상심리사로 남아 있을까? 여러 임상심리사를 만났다. 전문적인 수련을 받고 희망을 품은 채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대우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고, 직업에 대한 만족도도 낮아졌다. 빡빡한 스케줄과 반비례하는 처우, 견디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 당연히 이직률이 높고, 이런 대우를 받느니 차라리 센터를 개소하는 게 낫겠다고 여기는 이도 있었다. 혹은 결혼하고 더 이상 이 길을 걸어가지 않는 이도 여럿 봤다. 임상심리사로 살아가는 길이 희망차고 보람 있는 일만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미안하다. 그렇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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