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조선 후기인가? 신석기시대까지 7천년의 유구한 우리 역사에서 왜 얼마 안되는 조선 후기만을 보겠다는 걸까? 예술적으로 보아도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라든가 울주 만구대의 암각화부터 해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고려,조선전기 등과 같은 시기의 휘황찬란한 예술작품들이 즐비한데 왜 조선 후기의 예술만을 거론하는 것일까? 조선후기 이전의 예술품들이 가치가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앞에서 본 것처럼 조선 후기의 예술이 우리에게 있어 상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대를 연이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한국적인 미는 대부분 조선 후기의 예술품이 지니고 있는 미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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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못 말리는 한국인이여! 이렇게 자유분방하니 나라가 항상 시끄러울 수밖에. 저 자유분방한 에너지만 잘 추스릴 수 있다면 엄청난 저력이 나올 텐데. 세계를 놀라게 한 경제개발도 저 에너지 덕이겠지....... 이런 여러 상념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 어떻든 이렇듯 우리 음악인들은 자신의 해석 없이 배운 대로만 연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런 음악을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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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이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주로 그렸다면, 풍속화에 있어서 그와 쌍벽을 이루는 혜원은 서민들의 드러나지 않은 색태(色態)적인, 다시 말해 에로틱한 광경을 그렸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혜원도 서민생활의 일상적인 모습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대표적인 그림은 냇가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남정네들이 몰래 보고 있는 것을 그린 그림이나 밤에 남녀가 몰래 만나는 그림, 또는 한량과 기녀들이 중심이 된 에로틱한 그림들이다. 이런 그림들만 그리는 혜원을 도화원(궁중의 화원들이 속한 부서)에서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러나 혜원은 도화원에서 쫓겨났지만 당당했던 모양이다. 당시로서는 포르노그래피에 해당될 자신의 그림에 관지(款識) 와 도인(圖印)하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혜원 자신의 자유분방한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러한 대담 솔직한 표현이 어느 정도는 먹혀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한 요인이 될 것이다. 당시는 이미 유교가 사회를 엄격하게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시기였기에 인간의 감정을 옹호하는 반유교적인 그림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연당야유도」와 같은 그림은 당시로서는 실로 대담한 그림이었다. 연꽃이 핀 연못 옆에서 한량들이 기생을 뒤로 껴안고 가야금 연주를 듣고 있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아무리 유교가 쇠퇴한 시기라 해도 당시 사회가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혜원이 살던 시대는 전시대와 비교해 볼 때 훨씬 사치와 유흥을 즐기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가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또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우리는 혜원의 이 그림을 통해 한층 더 자유로워진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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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거문고 산조의 명인 한갑득의 이야기다. 원래는 서편제의스타이자 지금은 국립극장장이 된 김명곤의 '광대열전'에 나오는 이야기 인데, 나는 이성재의 '재미있는 국악길라잡이'(서울미디어, 1994, 94쪽)에서 인용한다.
'요새는 문화재 지정이니 뭐니 해서 선생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여, 선생한테는 기본 가락을 배우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지 재주껏 편곡도 하고 창작도 해서 타야 좋지. 밤낮 배운 대로만 허면 그건 밥만 먹고 똥만 싸는 꼴이지......
그리고 즉흥적인 멋이 있어야 허니 한 음 켜놓고 그 다음에 동으로 갈지 남으로 갈지 북으로 갈지 서로 갈지 몰라. 그래서 산조가 어려운 거고 그래서 산조가 좋은 거여...... 자유자재허고 신출귀몰허고 구석구석 기묘허고 마음대로 사람을 울리고 웃기고, 그래서 국악이 좋은거여.'
아! 못말리는 한국인이여! 이렇게 자유분방하니 나라가 항상 시끄러울 수밖에, 저 자유분방한 에너지만 잘 추스리면 엄청난 저력이 나올 텐데. 세계를 놀라게 한 경제개발도 저 에너지 덕이겠지...... 이런 여러 상념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 어떻든 이렇듯 우리 음악인들은 자신의 해석 없이 배운 대로만 연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런 음악을 무시했다.
--- p. 117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했던 최순우 선생은 이 달항아리를 두고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후덕함을 지녔다고 칭송했다. 도자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평범하게 보이는 도자기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항아리는 보면 볼수록 그 깊은 맛이 우러난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으니 이런게 바로 명품인거 같다. 달항아리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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