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한 일상 속에 허덕이는 동안 우리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남는다. 분주함 속에서 바스러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잃어버린 높이와 깊이의 차원을 되찾아야 한다. 세상의 평가와 무관하게 우리 삶이 무한히 소중하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이지만, 우리가 써가는 삶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 pp.32~33
상황이 위급할 때면 우리는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써 나의 안위를 보장받고 싶어 한다.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두렵고 떨리지만 한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때, 우리는 비로소 신뢰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런 용기이다. 추상적인 사랑 담론에서 벗어나 우리 곁에 다가온 사람 하나에게 성심을 다할 때, 문득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pp.42~43
어둠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빛을 향해 고개를 들어야 한다. 세상에는 어둠을 만드는 이들이 여전히 많은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모욕감을 안겨주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을 보면 암담하다. 세상 어디에도 설 땅이 없는 난민들은 오도 가도 못한 채 국경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어떤 이들은 바다를 건너려다 검은 물속에 빠지기도 한다. 참 빛을 기다리는 이들은 맥을 놓고 기다리면 안 된다. 작은 등불 하나라도 밝혀야 한다. 인간의 등불 말이다.
--- pp.57~58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가끔은 지치고 낙심한다. 아무리 애써보아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쓸쓸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마음을 안추르고 다시 무모한 도전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시간을 선물로 주신 분에 대한 예의이다. 파커 파머도 가끔 결과가 눈에 띄지 않을 때 실망에 빠지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친구의 말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나는 얼마나 실적을 올리고 있는지 자문한 적이 한 번도 없고, 내가 신실한지 여부만 물어왔다.” 우리 내면에 세상의 어떤 어둠으로도 지울 수 없는 빛이 스며들면 좋겠다.
--- p.63
몸의 한편을 열어 누군가의 품이 되어준다는 것, 이보다 더 거룩한 일이 또 있을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신 분의 삶이 이러하지 않았는가? 성령강림 이후 제자들은 ‘그 이름’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이름’으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켜 세웠고, 욕망의 포로가 되어 살던 이들을 해방시켜 다른 이들과 덩더꿍 자유의 춤을 출 줄 아는 이들로 만들었다. 굳은 몸을 이리저리 틀어 소나무가 자랄 틈을 만들어준 그 늙은 바위를 생각한다. 교회의 품이 넓어져야 한다.
--- p.73
성경은 계약이 아닌 언약에 근거한 세상을 그려 보인다. 언약 공동체의 핵심은 이익이 아니라 관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가 아니라 ‘우리’이다. 개별적 존재인 ‘나’를 ‘우리’로 묶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언약에 참여하는 이들은 공유된 비전에 의해 움직이고, 서로에 대해 책임을 다한다. 교회가 사랑과 우애라는 기초 위에 우뚝 설 때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p.77
무정한 마음이 공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때 세상은 냉혹하게 변한다. 타자에 대한 적대감이 일상이 될 때 우리는 세상을 고향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불안이 스멀스멀 우리 영혼을 잠식할 때 진정한 안식은 불가능해진다. 적대적 공간을 환대의 공간으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의 소명이다.
--- pp.86~87
예수님은 당시 성전 체제에 기대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살던 이들의 몰이해와 불신 가운데 사셨지만, 고통과 소외 속에 살던 이들을 향한 사랑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으셨다. 자기 확신을 관철하기 위해 사람들을 타자화하는 것은 예수 정신과 무관하다. 각 사람이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그 마음이야말로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부활은 그 마음이 불멸임을 보여주는 징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말씀을 붙들고 혼돈과 공허의 어둠을 뚫고 나아가야 한다.
--- p.94
욕망의 터전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세상은 사람을 끝없이 고립시킨다. 고립된 사람을 지배하는 정서가 바로 불안이다. 불안에 사로잡힌 영혼은 그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어줄 수 있는 대상들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카프카(Franz Kafka)의 성처럼 다가설수록 멀어진다.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가치는 고립에 대항하는 연대의 용기이다. 연대라 하여 비장할 것까지는 없다. 눈물 흘리는 이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것도 연대이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 일이 그릇되지 않았음을 넌지시 일깨우는 것도 연대이다.
--- p.106
정치, 경제, 문화, 언론, 사법, 종교의 영역에서 발화되는 말들이 세상을 어지러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태도가 있다면 ‘머뭇거림’이 아닐까? 머뭇거림은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으려는 겸허함, 함부로 속단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조차 수용하려는 열린 마음을 내포한다. 모든 틈은 깨진 상처인 동시에 빛이 스며드는 통로인 것처럼, 머뭇거림은 우유부단함처럼 보이지만 나와 타자가 함께 숨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머뭇거림이 사람을 자기 초월의 방향으로 인도한다.
--- p.110
모든 고통이 다 정신의 숭고함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인간 정신의 숭고함은 언제나 비범한 고통을 통해 발현된다. 비범한 고통이란 어쩔 수 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수동적 고통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고통이다. 약자들을 삼키는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그 격랑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의 제단 앞에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바로 그러한 진실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 p.124
참된 종교는 사람들을 더 큰 이야기 속으로 초대함으로 자기를 초월하게 한다. 사람들에게 불확실함과 함께 살아갈 용기를 부여한다. 사람들을 개별화시키는 세상에 맞서 연대의 기쁨을 누리게 해준다. 일상 속에 깃든 영원의 불꽃을 보게 만든다.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슬픔에 잠긴 이들을 위로하고, 위기에 처한 이들의 설 자리가 되기 위해 몸을 낮추는 이들은 얼마나 숭고한가? 약자들을 희생시키는 불의한 제도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의와 평화와 기쁨이야말로 종교의 참됨을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 p.146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고통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고립감, 버림받음에 대한 의식, 무의미성이다. 하지만 우리 삶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삶은 견딜 만해진다. 옳음을 전유하려는 욕망은 연결을 끊는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우정과 환대의 장소를 만드는 이들이 세상의 숨구멍이다. 이들은 눈에 보이진 않아도 작은 산 너머에 큰 산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 p.162
지거 쾨더는 사랑이야말로 역사의 기원인 동시에 목표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부둥켜안음 혹은 얼싸안음 속에서 새로운 현실이 태어난다. 슬픔, 아픔, 고픔의 자리에 선 이들을 부둥켜안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잉태하는 일이다. 좋은 세상을 기다리는 이들은 먼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 p.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