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6·25 전쟁이 나고, 휴전이 되기 전에 상주의 시골구석에서 선생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관응 스님께서 남장사로 저를 불러서 조용하게 말씀을 하셨어요. 저에게 출가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신 것입니다. 스님은 저에게 “사람들에게는 여러 길이 놓여 있는데, 출가하는 것도 매우 좋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이 길이 좋지 않으면 권하지도 않는다. 잘 생각해 보거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저에게 『진리』라는 책 열 권을 출가하기 전에 읽어 보라고 주셨지요. 그런 말을 들은 저는 우선 “생각해 보겠습니다”고 하고는 며칠 동안 약간 고민을 하고서 관응 스님에게 출가하겠다는 제 뜻을 말씀드렸지요. 그리 오래 망설이지 않고, 그냥 쉽게 결정했지요. 그러니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가 결심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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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선방에 가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선방에 안 가면서도 화두를 들고 살아야 된다는 인식은 있었지요. 그래서 동산 스님에게 받은 화두를 갖고 새벽과 취침하기 전 한 시간씩은 참선을 하고 있어요. 지금도 언제나 그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있는 이곳에 선객들이 다녀가면 촉진제가 돼요. 제자들이 선방에 가서 공부를 하는데, 저도 공부가 처지면 안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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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조계사에서 전국 승려대회가 열렸는데 승려대회가 열린 조계사 법당에서 구산 스님이 혈서를 써서 대중들에게 보여 주었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구산 스님의 혈서를 사진 찍은 것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때 조계사에서 정화운동에 참석한 스님 수백 명이 단체로 조계사 법당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최근 『불교신문』에 그 당시 정화운동 현장인 조계사 법당 앞에서 찍은 사진이 나왔는데, 그 사진(1955. 8.)을 자세히 보니깐 저도 그 사진에 나오더라구요. 제가 그런 사진을 찍을 때 빠질 리가 없지요. 정화운동 당시에 비구스님보다 비구니들이 더 많이 참석했습니다. 비구니들이 정화운동에 공로가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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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처음에는 재무를 보았지요. 그러다가 강사를 하게 되었어요. 어느 날, 눈이 펄펄 오는데 숯을 굽는 데 가보자고 해서 태경 스님과 함께 험한 산을 올라가 본 적도 있습니다. 만우 스님의 후임으로 오신 성능(性能) 스님이 저에게 강의하는 것을 넘겨주는 전강을 해 주셨습니다. 성능 스님은 박한영의 제자로 해인사와 통도사에서도 강의를 하신 훌륭한 강사이십니다. 어느 날 아침, 당신이 앉으시던 좌복을 중강을 하는 저한테 밀어주는 거예요. 그게 전부입니다. 그리고서는 “오늘부터는 여기에 앉아서 강의를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좌복 하나 받은 것이 전강의 전부에요. 성능 스님께서 보여 주신 그날의 전강 자리는 그 어떤 호화로운 것보다 더한 것이었습니다. 내게는 그래서 더 무겁고 고귀하여 가슴 벅찬 자리였다고 생각합니다.
--- p.87
청룡사는 본래 정업원(淨業院)이라고 해서 궁중하고 관련이 깊고, 조선 시대 이래로 비구니 사찰입니다. 제가 거기 머물면서 강원이 생긴 것이지요. 제가 대학원을 마치고 운문사 강사로 내려갔던 1970년까지 거의 10년간을 가르쳤습니다. 청룡사에서 배우던 스님은 혜은 스님, 진홍 스님, 성호 스님, 계호 스님 등입니다. 그때 청룡사 주지인 윤호 스님의 도움이 아주 컸습니다. 그때 비구니회장을 한 명우 스님도 거기에서 같이 살면서 나에게 배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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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운문사로 내려가려는 그때 제 지도교수인 김동화 박사님이 저에게 원시불교를 맡아서 가르치라고 그랬어요. 그래도 저는 내려간다고 하니깐, “시골에서의 공부는 서울에서 낮잠 자는 거와 같다”는 말씀까지 하시면서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도 저는 “동국대 강의는 일반 사람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운문사 비구니 교육에 더 중요성을 느낀다”고 말씀을 드리고 내려왔지요. 제가 안 내려가면 비구니 강원이 문을 닫는 상황인데, 그리되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나선 것이지요.
--- p.110
제가 여기 운문사 강사로 올 때가 마흔 살이었습니다. 그때 강사로 내려오면서 새롭게 강원 교육을 할 시책을 갖고 왔어요. 강원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는 일선에 나가서 교법을 유포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추어 져 있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구태의연한 교과목 개편을 과감하게 시도했지요. 저는 겸학을 강조했어요. 내전과 외전을 다 배워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현시대에 적응하는 교육을 시켜야 되겠다는 것이었죠. 수행도 잘해야 하겠지만, 수행의 이면에는 모든 것을 박학(博學)으로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현시대 사조에 적응하는 교육을 시도했어요. 그때 저는 한국의 운문사가 아니라 세계적인 운문사, 국위 선양을 하는 운문사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우물 안 개구리는 되지 말자고 했지요.
--- p.114
우리 인구의 절반이 여성이 아닙니까? 그런 여성을 우리 비구니스님들이 담당해서 교화를 해야 합니다. 우리 비구니들은 일체중생의 어머니인 관세음보살의 자비 사상을 발휘해 가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실 생활에 전달할 수 있는 의무와 사명감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p.135
제가 한 일을 갖고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청룡사에서 우담바라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강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그 전에 청룡사에서 비구니들의 자주적, 자생적인 수행 흐름이 조성되었어요. 제가 『사미니율의』를 펴내고, 비구니 200여 명에게 수계를 하도록 주선했습니다. 이런 것도 차후에는 역사적인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 p.164
비구니회장으로 하였던 일 중에서 보람이 있는 것은 비구니스님들의 평가, 복원 작업을 한 것입니다. 한국 비구니의 수행 전통이라는 포럼을 하고, 거기에서 발표된 글을 모아서 책을 냈어요.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을 두 권을 펴냈지요. 제가 회장을 할 때 그런 가치가 있는 책을 낸 것을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 p.170
부처님이 장부(丈夫)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이 장부라면 비구스님뿐만 아니라 우리 비구니스님도 장부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비구니스님들은 섬세하고, 자비스러워요. 관세음보살과 같은 자비 사상을 갖고 여성 불자를 포함한 신도들을 제도해야 합니다. 모든 신도를 교화할 수 있다는 신심, 능력,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비구니스님들은 실력이나 여건 등 모든 방면에서 전 세계 불교 여성 수행자들을 이끌어 가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장부(丈夫)이면 나도 장부’라는 당당한 마음, 자긍심을 갖고 수행과 포교를 이끌어 가는 비구니스님이 되길 바라지요.
---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