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자식을 구타하거나 방치해서 죽인 경우도 허다하다. 인간의 심리는 알면 알수록 오묘하다. 누구나 자신만의 견고한 세계 안에 갇혀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형성되어 왔다. 격분과 신경질, 우울과 의심, 좌절과 자기비하 등등의 부정적 심리가 딱히 이유 없이 일어나기도 한다. 혹은 어떤 일이 촉매가 되어 일어나기도 한다. 때때로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행동으로 옮겨진다. 호되게 질책하고 고함을 지르거나 싸잡아서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감정을 폭발시켜 놓고 나서도 시원하지가 않다. 서로 상처를 받거나 관계가 악화된다. 습관처럼 불거지는 언행에 대해 수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평생을 그렇게 반복해서 살아간다. 자신이 만든 세계에 갇혀서 꼼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깨닫고 노력한다고 순식간에 되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보자. 아동학대를 행한 부모는 자신도 그렇게 자라온 것이다. 애정과 조건 없는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라왔다면 그런 마음을 낼 수 있다. 그 반대라면, 끔찍하다.
---「특별한 기회」중에서
당신의 인생은 성공적이신가. 이 질문에 자못 당황하거나 억울한 마음이 든다면, 송구하다.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성공’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 아니냐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말에는 잠시 주저하다가 올해의 목표, 이번 달의 목표, 혹은 버킷리스트를 읊을 것이다. 그것을 다 이루면 성공이냐, 혹시 이루지 못하면 실패한 것이냐고 물어보면 당황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을 것이다.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실패하려고 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살다 보면 무수한 실패의 순간이 있다. 하는 일마다 단 한 번에 모조리 이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성공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누구나 성공을 갈망한다. 원래 학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학’을 붙일 정도로 성공에 대한 열망이 높다. 눈에 보이는 것 위주로 성공을 정할 때 허망하기 그지없다. 돈, 권력, 부귀영화가 그렇다. 그 모든 것을 가지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당신의 인생은 성공인가?」중에서
내가 하는 방식은 이러하다. 올해의 마지막 날, 어떤 한 해가 되었는지 떠올린다. 살아보지 않은 날들을 떠올리는 것은 직관과 상상에 의해서다. 그때의 내가 지금 현재의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그렇게 한해의 첫발을 내딛는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표가 되게 한다. 범위를 넓히면, 생의 마지막 날을 떠올릴 수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순간으로 가 본다. 역시 직관과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지만, 하나 더 있다. 영혼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이다. 가치관에 따라서는 육체와 영혼이 함께 사라진다고 볼 것이다. 원래 보이지 않은 존재인 영혼이 육체가 소멸했다고 같이 없어진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가기 마련이다. 생애 마지막 날은 영혼이 그에 맞는 차원으로 가는 날이다. 본향으로 돌아가는 멋진 순간이기도 하다. 그때, 영혼만이 남아서 생애를 돌아보며 무엇이라고 하게 될까? 온갖 감각으로 채웠던 육체를 버리고 가는 순간, 영혼이 가지고 가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을 놓치지 마」중에서
주어진 역할, 과제, 목표 달성에만 급급하다. 만점이 되는 성과를 이뤘다면, 과정을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늘 경쟁과 속도의 구조 속에 휘말려서 살아간다. 하고 싶은 일 따위를 생각해서 뭣하겠는가. 녹록하지 않은 현실에 맞추려면, 꿈 따위는 팽개쳐야 한다. 어떤가. 이 말에 비분강개의 마음이 든다면, 박수를 쳐주고 싶다. 아마도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나도 그렇게 살아왔으니, 내 자식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초등학생들한테 ‘꿈’을 얘기해보면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말했다. 생애 전혀 이뤄질 확률이 드문 꿈이라도 좋았다. 과거형으로 쓰는 이유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자꾸 캐물으면, 프로게이머라고 대답한다. 그 정도에서 생각을 멈추고 만다. 꿈을 지우고 사라지게 하는 것이 유행인 사회다. 꿈이 없는 삶이니 삶의 만족도가 높을 리 없다. 꿈은 위험한 것인가? ‘꿈’은 고단한 삶의 행보를 ‘그래도’ 꾸준히 걷게 하는 원동력이다. 철학자 니체Nietzsche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라고 했다. 앞부분을 ‘꿈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은’이라고 바꿔서 읽으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중에서
17세기 영국의 수필가였던 조지프 애디슨Joseph Addison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일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즉, 세 범주를 하나로 엮은 사람을 말한다. 자신에게 물어보자. 지금 일하고 있는가? 사랑하고 있는가? 희망이 있는가? 세 가지 모두 맞는다면, 행복한 것이다. 그것도 가장! 여기에서 ‘일’은 재화를 벌어들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긍정 에너지를 가지고 행하는 모든 것이 ‘일’에 속한다. 소득을 얻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특별한 소득은 없지만, 선량한 일로 이타심을 내고 있다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진정한 일 속에는 ‘사랑’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사랑은 삶의 성장과 성숙이라는 ‘희망’을 불러온다. 일, 사랑, 희망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행복으로 이어진다.
---「행복하다는 증거」중에서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여러 각도에서 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큰 장에서 파악해보자. 코로나 시대인가? 통합의 시대인가? 이 역시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좀 더 핵심을 짚어보자. 지금은 아픈 시대이다. 그러니 치유가 절실한 시대이다. 신기하게도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류는 아프다. 속도와 경쟁으로 치닫는 구조는 자연스러움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연의 한 존재인 인간이 자연스러움을 잃을 때 병리 현상 속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휴대폰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불안해지는 현대인은 누구나 기계에 중독되어 있다. 자연과 소통하는 시간은 극히 드물다. 인간끼리도 원활한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게임에 몰두한다. 사이버 세계는 흥밋거리가 무궁무진하다. 즉각 보상이 주어지며, 휘황찬란하게 변신할 수도 있다. 반면, 현실은 냉혹하다. 평가와 잣대의 시선이 달라붙는다. 그것을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도 없다. 날마다 기를 쓰고 앞질러서 달려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가치를 드러낼 자신이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다. 인간은 육체라는 물질과 영혼이라는 비물질로 이뤄져 있다. 육체는 3차원에 있지만, 영혼은 3차원을 초월할 수 있다. 육체는 사라지지만, 영혼은 사라질 수가 없다. 다만, 차원을 이동해서 이미 온 곳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 자명한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바로 치유를 향한 통찰의 길이다.
---「지금은 아픈 시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