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저격수에게 방아쇠를 당겨야 할 순간은 언제나 단 한 번뿐이다. 격발의 순간을 놓친 저격수에게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 p.148
계절이 바뀌고 해를 더하는 동안 나는 금강산의 일부가 되었다. 토끼의 길과 노루의 서식처, 호랑이의 사냥터와 멧돼지의 동선이 내 손안에 들어왔다. 눈을 감고도 내달릴 수 있을 만큼 금강이 발에 익었다. 호랑이를 네 마리 더 잡았고, 금강산에 무서운 범포수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태백준령을 따라 번져나갔다. 내가 잡은 다섯 마리 호랑이가 스무 마리로 슬금슬금 불어나더니, 일곱 마리째를 잡고 덕원장터에 내려갔더니 어느새 오십 마리를 잡은 것으로 불어나 있었다.
--- p.282
세 개 포연대의 포수 모두가 지켜보는 눈앞에서 산평 포수계의 수포수 넷을 데리고 일본군을 통쾌하게 쓰러뜨리며 그들의 치욕을 씻겨준 것이 유기운이었다. 내가 정면 대결을 펼치겠다는 유기운의 주장을 받아들인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책임감과 자신감은 가장 뒤처졌던 자를 가장 앞선 자로 만들기도 하고 가장 앞섰던 자를 가장 뒤처진 자로 만들기도 하는 마술이었다.
“포수의 것은?”
주먹을 치켜든 유기운이 어젯밤 내가 물었던 것을 그의 수하 포수들에게 물었다.
“포수에게!”
산평 포수계의 포수들이 하늘을 찌를 기세로 일제히 대답했다. 유기운은 그런 포수들을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
“조선의 것은?”
“조선에게!”
--- p.581
2권
“진포와 현창하, 안국환이 전설입니다. 일격필살의 여성 저격수이자 작전참모 진포, 열여섯 살의 청년저격대장 현창하, 하루에 백 개의 적정을 탐지하는 도주 안국환, 이들은 지금까지 어느 전쟁에서도 보지 못한 영웅이었어요…… 제가 삼수성 점령 작전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은 왜놈들의 모가지도, 총기도, 식량도 아닙니다. 저는 일본 육군의 신화가 된 하세가와의 직할 부대를 이긴 진포와 현창하, 안국환의 이름을 양반들이 말과 글로 깎아내릴 수도, 고쳐 쓸 수도, 지워버릴 수도 없는 전설로 만들고 싶습니다.”
“젊은 그애들을 전설로 만들어 하세가와의 신화를 무너뜨리고 우린 죽자, 이 소리지?”
“네.”
하세가와는 자기가 양성한 저격수들의 전공을 가로채 신화가 되었지만 나는 나의 대원들을 전설로 만들고 싶었다.
--- p.19
가지 않는 겨울은 없고, 오지 않는 봄도 없었다.
--- p.60
“사람이 하는 행동이란 마치 날아가는 탄환과 같은 것일세. 탄환이 가던 방향을 바꾸어 날아가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사람의 행동도 그런 것이네. 지금까지 그가 해온 행동이 그가 앞으로 할 행동이네.”
--- p.122
총을 잡는 자는 누군가를 죽여야 하고, 그 일은 언젠가 자신 또한 누군가의 총에 죽어야 끝이 난다.
--- p.132
“수괴 한두 두를 잡는다고 전세가 달라지겠소?”
내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안중근이 되물었다.
“왜군 수백 두를 잡으면 전세가 달라집니까?”
나는 말문이 막혔다.
“제가 적의 수괴 한 두를 잡는다고 해서, 장군님께서 일본군 수백, 수천 두를 잡는다고 해서 물러날 일본이 아니겠지요. 그걸 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싸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아니까 싸우는 것이지요.”
--- p.273
나는 내 아들 양순이를 양정의숙에 보낼 수 없었지만 조강록은 기어코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나는 실패하더라도 누군가는 살아남아 또 싸워야 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방법으로 더 잘 싸워야 했다. 나에게는 다시 기회가 없더라도 우리에게는 다른 기회가 남아 있어야 했다.
--- p.350
“언제, 한 번이라도 우리에게 기약할 내일이 있었소?”
“기약할 내일은 없어도 싸워야 할 내일은 있지 않습니까. 내일 아침에도 제가 살아서 눈을 뜨기만 한다면 저에게 싸울 날이 하루 더 생기는 것이니까요.”
--- p.448
“뭐가 보인다고 그러십니까?”
“길이 보이지 않으면 그건 아직 몸을 덜 낮춰서 그런 것이오.”
나는 쪼그려앉은 그의 옆에 손을 짚고 엎드렸다. 지청천이 나를 따라 엎드렸다.
“보이오?”
나는 눈 덮인 잡목 아래로 난 토끼길을 바라보며 내 옆에 네 발로 엎드린 지청천에게 물었다.
“이건 일본 육사의 교범에 없는 모양이오. 몸을 낮춰야 보이는 것이 길이오. 많이 배운 사람들일수록 길을 밟고 서 있으면서도 길이 없다고 하오. 길은 허공에 있지 않고 땅바닥에 있는데, 허공만 쳐다보면 길이 어떻게 보이겠소.”
내 옆에 나란히 엎드린 지청천의 표정이 바뀌었다.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은 몸이 너무 높기 때문이오. 기어서라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날아서 가려고만 하니 발밑에 놓인 길이 보이겠소? 짐승의 높이로 낮아지면 길은 어디에나 있소.”
--- p.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