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나는 평안북도 신의주시 고진면 남제동에서 1936년에 7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당시 소학교) 3학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일제 강점에서 조국이 해방되었고 그 이듬해까지 남제동에서 살았다. 10년 터울의 형님과 11년 아래의 막내를 제외한 중간의 다섯은 모두 남제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님(이종범 장로)은 대구고보(지금의 경북고등학교) 제일회 출신으로 대단히 완고한 불교 가정의 3남 2녀 중 막내로 1901년에 태어나셨다. 대구고보에 다닐 때 예수님을 알게 되어 크리스천이 되었는데 완고한 불교 가정에서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웠을까. 고보를 졸업하고 나서 더 공부하고 싶었으나 국내에서는 사정이 여의찮아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가출하다시피 집을 나와 일본으로 건너가 동지사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였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집을 떠날 때 할아버지의 방문 앞 땅바닥에 엎드려 “아버님! 저 떠나겠습니다.” 하며 큰절을 올렸으나 할아버지는 방문을 열어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동지사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종종(아마 여름방학 동안) 일등원이라는 기독교 수도원에 들어가 생활했다고 했다. 그곳의 생활은 엄격하여 침묵하며 철저한 규율에 따라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성경 읽고, 봉사하는 시간표에 따라 진행되었다. 당시에 변소는 재래식이긴 하지만 일본식으로 비교적 더럽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남몰래 청소하는 것이었다. 종범학생도 저녁에 청소하려고 가 보면 누군가가 이미 청소를 해놓았다. 그래서 밤 12시, 새벽 3시, 새벽 5시에 가도 보이지 않는 손은 이미 다녀간 뒤였다. 일등원에서의 봉사 정신은 아버님의 일생의 교육자 생활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님에게 들은 일등원의 생활과 가가와 도요히코의 인격과 삶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신학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가지 않고 당시에 가장 기독교화된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에 있는 한 교회의 전도사로 갔다가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의 교사로 전직하였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신의주시 고진면 남제동에 있는 복성학교로 와서 교무주임이라는 직책으로 학교를 책임지고 운영하였다. 남제동에는 많은 지주들(주로 조씨들)이 살고 있어 비교적 부유한 촌마을이었다. 복성학교는 조씨 가문에서 운영하고 있었고, 교장은 아버님에게 학교 운영을 다 위임하고 학교에는 나오지 않았다. 어머님(박영신 권사)은 의주군 비현면 노북동(압록강가의 시골마을)에서 6남매(2남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노북동은 일찍이 기독교화된 박씨 집성촌으로 한국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시골 마을이었다. 어머니는, 혈혈단신 남쪽에서 와서 교회 일을 하고 있던 이종범 총각을 만나 17세에 결혼하고 18세에 첫아들을 낳았다. 그 당시에는 이렇게 먼 남쪽의 남자와 결혼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나의 큰형님(1926년생)은 어린 시절에 동네 사람들이 아이노꼬(일본어로 혼혈아라는 의미)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했다. 아무튼 우리 부모님은 당시에 보기 드문 남남북녀의 한 쌍이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 편으로는 2세대, 어머님 편으로는 3세대의 기독교 신앙을 전수받은 세대가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한 주일에 두세 차례씩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에는 엿이나 과일로 다과를 나눈 기억이 난다. 잘사는 살림은 아니었지만, 집 주위의 채소밭에서 채소와 감자, 고구마, 오이, 호박, 토마토, 참외까지…. 그리고 콩과 옥수수도 수확하고, 앵두, 포도, 살구, 배, 밤도 있어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하였다. 양계장에는 많을 때는 300마리나 되는 흰 닭(레그혼종)을 키워 달걀과 닭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해방이 된 기쁨도 잠시 소련군이 들어오고 공산당이 세력을 강화하기 시작하면서 온 지역을 공산당이 장악했다. 우리 온 가족의 삶의 중심이었던 학교 옆 남산교회는 공산당의 횡포로 문을 닫게 되었다. 소작농(마가리라고 불리다)이었던 사람들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지주들의 집을 습격하여 주인들을 때려 내쫓고 약탈하여 뺏어가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심한 곤욕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채마밭도 집도 다 버리고 한 십 리쯤 떨어진 석하(石下, 신의주 쪽으로 가까운 마을)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그 이듬해(1946)에 시행된 화폐개혁 때 모든 것을 다 몰수 당하고 말았다.
석하라는 시골 마을은 남제동 같은 지주촌은 아니었다. 몇 채의 큰 기와집은 있었으나 보통 농민들과 서민들이 사는 동네였다. 고진인민학교 옆에 중국인이 소유한 넓은 농원도 있고 학교 앞에는 잡화상점도 있고, 농가들도 있어 약간 도시 냄새도 풍기는 농촌 마을이었다. 공산당 치하에서 아버님은 제9인민학교(고진인민학교)와 제5중학교를 겸하는 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아마도 1945년 하반기부터 1947년 전반기까지 약 2년 정도 봉직하였고, 나는 제9 인민학교의 4,5학년을 그곳에서 마쳤다. 인민학교가 5년제로 되던 해의 제1회였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