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새로운 일이 일어나도록 1년만 완전한 자유 시간이 있었으면 했다. 그런데 과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까? 내가 유용하고 중요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게 해 주는 모든 일들을 놓을 수 있을까? 그간 내가 바쁜 삶에 꽤 중독됐다는 생각이 든다. 금단증상인지 약간의 불안마저 느껴진다. 나 자신을 의자에 붙들어 매야 한다. 다시 일어나 아무거나 관심이 끌리는 일로 바빠지고 싶은 거센 충동을 다스려야 한다.
--- pp.19~20
나는 나이가 들고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기도가 더 쉬워지려니 기대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인 것 같다. 지금의 내 기도를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은 어두움과 무미건조함이 아닐까? … (중략) … 내 기도의 어두움과 무미건조함은 하나님의 부재의 신호인가, 아니면 내 감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보다 깊고 넓은 임재의 신호인가? 내 기도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종말인가, 아니면 말과 감정과 몸의 감각을 초월하는 새로운 연합의 시작인가? … (중략) … 내 기도가 싸늘히 식었다고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 놓인 한 해는 분명 기도의 해가 되리라. 내 기도는 분명 싸늘히 식었지만 내 속의 성령의 기도는 결코 그렇지 않다. 어쩌면 내 기도,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는 내 노력, 하나님과 연합하려는 내 방식을 버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 자유로이 운행하시도록 해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 pp.24~25
삶에는 즐길 거리가 많다. 그러나 그것을 앞으로 하나님의 집에서 보고 듣게 될 것들의 맛보기로 즐길 수 없는 한, 죽음의 한계 앞에서 우리의 모든 낙은 헛되고 부질없고 심지어 공허하기까지 할 것이다.
--- p.36
오늘 읽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막 4:22, 새번역). ‘숨겨지고 감추어진’ 지금의 내 삶을 바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와닿는다. 내 고독에 충실할수록 내 공동체에 더 풍성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 시기를 정결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다. 내 가장 내밀한 생각과 감정은 언제 어디서든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드러난 것이 보는 이들에게 기쁨이 되기를 기도한다.
--- p.55
걸핏하면 도져서 다시 피 흘리기 시작하는 이 내면의 상처를 어찌할 것인가? 너무나 익히 아는 상처다. 오랜 세월 내게 자리한 것이다. 이 상처 즉 사랑받고 싶은 끝 모르는 욕구와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집요한 두려움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늘 버티고 있다. … (중략) … 나의 이 상처는 위장된 선물임을 나는 알고 있다. 짤막짤막하면서도 강렬한 이 많은 유기(遺棄)의 경험을 통해 나는, 두려움을 버리고 하나님의 손에 내 영혼을 맡기는 법을 배우는 새로운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그분은 끝없이 나를 받아 주신다. 나를 알며 기꺼이 내 상처를 싸매 주는 네이선과 다른 친구들에게 정말 고맙다. 그들이 있기에 나는 피 흘려 죽지 않고 온전한 삶을 향해 계속 걸어갈 수 있다.
--- pp.57~58
인생의 많은 사건은 우리를 너무나 쉽게 사방으로 잡아당기며 낙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박고 그분의 마음에 든든히 닻을 두는 한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다. 죽음도 두렵지 않다. 모든 기쁨과 모든 아픔이 예수님의 나라를 선포할 기회가 되는 것이다.
--- p.104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까? 동창생 중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 꽤 된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93세가 다 됐는데도 여전히 총기가 좋다. 나도 30년은 더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진정 그렇게 오래 살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어서 속히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를 바라는가? 분명한 것은 이 한 가지 사실이 아닐까.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한다. 얼마나 단순한 진리인가! 그래도 줄곧 되새길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오늘 평안을 베풀었는가? 누군가의 얼굴에 미소가 찾아들게 했는가? 치유의 말을 했는가? 분노와 원망을 버렸는가? 용서했는가? 사랑했는가? 이것이 정말 중요한 질문들이다! 내가 지금 뿌리는 한 줌의 사랑이 여기 이 세상에서와 다가오는 내생에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야 한다.
--- pp.121~122
서로의 존재를 가장 실감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의 부재를 깊이 경험한다. 커다란 상실의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가까움과 친밀함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성찬식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가운데 계신 그분의 임재를 선포하는 것이다! 임재와 부재, 가까움과 멂이 함께 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집의 아늑함을 미리 느끼는 셈이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부재로 인한 고통에 자신을 여는 것이다. 그 역설이 새삼 가슴에 와닿았다. 사순절은 부재, 빈자리, 미완성의 경험을 되새기는 때다. 그럴 때 우리는 복잡하고 분주한 삶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를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을 기다리고 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 pp.214~215
“내가 저 남자, 저 여자, 저 사람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저 가정, 저 나라, 저 인종에 속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저 회사, 저 팀, 저 무리의 일원이 아니니 나는 복된 자입니다!” 대부분 이런 기도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속으로 자신을 타인과 비교한다. 자신이 남들보다 나음을 어떻게든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두려움 많은 자아에서 솟아나는 기도다. 이 기도가 우리의 많은 생각과 행동을 좌우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위험한 기도다. 그것은 우리를 긍휼에서 시샘으로, 시샘에서 경쟁으로, 경쟁에서 폭력으로, 폭력에서 전쟁으로, 전쟁에서 파멸로 몰아간다. 그것은 거짓으로 점철된 기도다. 그토록 몸부림치며 밝혀 보려 해도 실상 우리는 남들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다. 우리의 가장 깊은 정체는 다른 사람들과의 유사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우리는 다 약하고 깨어진 죄인이며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딸인 것이다. … (중략) … 우리의 기도는 이래야 한다. “하나님, 저를 하나님의 피조 세계의 한 부분으로 이렇게 가치 있게 만드셨으니 감사합니다. 이 죄인을 긍휼히 여겨 주소서.”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요(눅 18:14), 하나님 나라에서 자신의 의로운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 pp.241~242
우리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분별해 내는 것, 그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던지시는 도전이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심지어 가장 비참한 사건까지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 탓하는 자세를 버리고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는 쪽으로 나아갈 각오만 있다면 내 삶은 근본부터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 (중략) …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비극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 비극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의 맥락 안에서 받아들이고 되새길 때 그 이야기는 성스러운 역사가 된다.
--- pp.244~24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요 16:16). … (중략) … 이 ‘조금 있는’ 시간은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다. 그것은 정화와 성화의 시간이요 하나님의 영원한 집으로 들어가는 놀라운 입주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조금 있는’ 동안 내가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의 징조를 일러 주고 싶다. 하나님의 날의 첫 햇살에 관해 말하고 싶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많은 징후를 증언하고 싶다. 나는 지나가는 이 세상에 대해 불평하고 싶지 않다. 일시적인 것들 속에서 빛을 발하는 영원한 것에 시선을 두고 싶다. 영원을 보며 누릴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고 싶다. 날마다 성찬식 식탁에 둘러앉을 때마다 나는 우리 안에 연합과 평화가 자라나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내가 ‘조금 있는’ 동안 살짝 맛보는 하나님 나라다.
--- pp.311~312
하지만 나이가 60 줄에 들어서다 보니 자연히 내 안에는 이전의 생각과 느낌과 감성과 열정과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생각과 느낌과 감성과 열정이 고개를 들곤 한다.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주변 세계에 대한 내 책임은 무엇인가?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은 무엇인가? 내 소명에 충실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전의 생활 및 사고방식을 고수해야 하는가, 아니면 일부 사람들에게 실망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용기를 구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30대 초반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갈수록 눈길을 끈다. 나는 이미 예수님보다 30년도 더 살았다. 예수님이 이렇게 오래 사셨다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사셨을까? 잘 모른다. 하지만 내 경우, 전에 몰랐던 새로운 의문과 관심사들이 나이가 들수록 많이 생겨난다. 공동체, 기도, 우정, 친밀함, 사역, 교회, 하나님, 삶, 죽음 등 인생의 모든 차원에 관련된 것들이다. 어떻게 하면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이런 의문을 자유로이 품을 수 있을까? 내가 아직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음을 안다. 여전히 두려움이 있다.
--- pp.315~316
세상에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도 많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 하루라는 시간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모든 작은 ‘상실’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 울분을 품고 인생이 억울하다고 불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실을 예수님을 위해 받는다면 즉 그분의 구속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으로 받는다면 오히려 상실을 통해 점차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새로운 삶에 마음을 열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나는 삶의 상실들을 나를 위해 당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위해 당하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생사를 가르는 선택이다.
--- pp.394~395
위선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님과 교회와 전체 공동체의 이름으로 말하려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실상보다 훌륭한 내용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도, 나조차 온전히 살지 못하는 삶으로 사람들을 부를 때가 왕왕 있다. 나는 위선의 최고의 치유책은 공동체라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영적 지도자인 내가 ‘내가 돌보는 사람들’과 가까이 살 때,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비판을 받으며 내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을 때 나는 위선자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위선이란 설교대로 살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설교대로 살 수 없음을 고백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나는 내 실수에 대해 우리 공동체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사제가 돼야 한다.
--- pp.41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