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쪽 의미로 보든, 금강은 세상의 무엇이든 잘라내고 이겨 낼 수 있는 강력함을 상징합니다. 아마도 중생의 번뇌와 어리석음을 깨트리려면, 무엇보다 단단하고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 p.14
불교 수행자이든 재가자이든 궁극의 종착지는 ‘행복’입니다. 그곳으로 향하는 나룻배 하나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 p.21
한국불교 대표 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에서는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수행의 지침, 삶의 근거로 삼는다는 뜻이지요.
--- p.22
“일체의 상(相)을 깨트려라.” 벼락 치듯 한 마디가 들려옵니다. 그 일침은 ‘모든 사물의 모양이나 형태에 관한 생각을 떠나라. 그것은 다만 이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과 사물에 관한 진실 하나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 pp.24~25
불교적 지혜는 내 눈에 덧씌워진 모든 분별을 걷어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 p.28
인도의 여러 종교와 사상 가운데 자아의 개념을 부정하는 것은 불교가 유일합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사상도 자아에 대한 관념을 버리라고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 pp.60~61
불교는 ‘나’가 있다는 생각부터 과연 그러한지 살펴보자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보던 시각을 완전히 뒤집고 있네요. 그러니 불교가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을 뿌리째 흔들기 때문입니다.
--- p.62
보시의 마음에는 자비심이 놓여 있습니다.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 타인의 고통을 없애 주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베푸는 행위로 타인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마음에서 생겨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
--- p.72
이 세상에서 ‘나’에 대한 관념만큼 뿌리 깊고 무서운 것이 ‘진리’에 대한 믿음이 아닐런지요. 지금 『금강경』에서는 그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법이라 부르는 것조차 하나의 이름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해탈과 열반 역시 이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설법은 뗏목과 같은 줄 알아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 p.79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더라도, 그 공덕은 어떤 사람이 『금강경』을 베껴 쓰고 받아 지녀 읽고 외우는 공덕에 미치지 못합니다. 『금강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이가 있다면, 그 공덕은 훨씬 뛰어난 것입니다. (…) 세상에 짓는 불탑이나 사원은 아무리 많이 지어도 언젠가 무너지고 사라지겠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짓는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 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 pp.106~107
깨달음이란 온 것도 간 것도 아니고, 생겨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 마음을 가리던 구름이 사라지면, 마음은 본래 평온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탐욕·분노·어리석음의 번뇌로 얼룩진 사이에도 언제나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 p.112
이미 사라진 과거의 일을 지금 일어나는 것처럼 아파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걱정하느라 우리는 현재를 놓치며 삽니다. 과거에 대한 회한, 미래에 대한 불안은 모두가 내가 만든 ‘생각의 집’입니다. 창살 없는 감옥에 자신을 가두지 말아야 합니다.
--- p.126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편집된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보는 세상의 모습은 내가 본 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그 실체는 비어 있습니다. 결국 『금강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지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실체 없음’·‘비어 있음’에 대한 자각입니다. ‘공’이라는 용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경전 전체에서 이처럼 공 사상이 넘쳐흐릅니다.
--- p.129
불교에서 ‘마음을 비워라, 버려라’ 하니까, 학생들은 다 비우고 어떻게 사느냐고 의아해합니다. 배고픈 욕구도 채우지 않고, 아파도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고 목석처럼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에 감응이 없다면 어찌 살아있는 것이겠습니까. (…) 추구하되, 거기에 묶이지 말라는 것. 이것이 핵심입니다.
--- p.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