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다. 아내와 아이들이 남편과 아빠를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주는 것이다. 함께해야 할 순간, 같이 나누고 기념해야 할 자리에 묵묵히 있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치욕스러운 자리든, 영광스러운 자리든, 고통을 나누는 순간이든,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이든, 가리거나 따지지 않고 곁을 지키는 일이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가장이란 어떤 순간, 어떤 자리라도 마다하지 않고 가정을 지키는 사람을 말한다. _‘아빠의 자리를 비워두지 마라’, p.111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언제나 새벽같이 일하러 가셨다. 밖은 아직 깜깜한데 일을 나가시는 아버지를 보면 왠지 안쓰럽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부스스 잠을 깬 나는 집을 나서시는 아버지 옷을 슬그머니 붙잡았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주머니를 뒤져 십 원짜리 종이돈 한 장을 손에 쥐여주셨다. 그러면 나는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잘 다녀오시라고 넙죽 인사를 드렸다. 은혜를 베푼 가장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저녁 무렵 집 앞에서 놀다 보면 멀리 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얼른 손부터 살폈다. 빈손으로 돌아오시는 날은 거의 없었다. 쌀이나 연탄, 과자나 수박, 혹은 돼지고기나 생선 몇 마리를 들고 오셨다. 가장의 화려한 귀가였다. 나는 얼른 달려가 또다시 넙죽 인사를 하고는 아버지 손에 든 걸 받아 들었다. 그것이 그날의 양식 혹은 간식거리였다. 새벽에 집을 나서실 때 아버지의 어깨는 축 처진 듯 보였지만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실 때는 언제나 개선장군처럼 늠름하고 당당했다. 일가식솔을 거느린 가장의 어깨란 그런 것이었다. _‘부모가 얼마나 힘든지 아이들도 알아야 한다’, pp.173~174
젊은이들은 언제나 변화를 원하고 새로운 꿈에 취해 살며, 늙은이들은 안정을 원하고 지나간 추억에 취해 살기 때문이다. 장성해서 아빠가 된 나 역시 어린 내 아이들과 맞지 않는 게 너무 많고 생각이나 정서, 취향 등에서 다른 점이 부지기수다.
매번 대통령 선거 때가 되면 우리나라의 세대 갈등은 극에 달한다. 진보와 보수,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대립을 보면 나라가 둘로 쪼개질 것만 같다. 평소 다정다감하던 아버지와 아들도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철천지원수같이 돼버린다. 세대 간의 이런 단절과 불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바자로프의 무덤에서 흐느끼는 노부부를 바라보며 투르게네프가 말했던 것처럼 영원한 화해와 무한한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_‘세대 차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p.183
아버지와 어머니, 나와 아내 네 사람이 함께 갈까 하는 생각에 표를 예매하려고 했더니 한 장에 10만 원이 넘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나는 두 장만 예매했다. 두 분이 얼마나 즐거워하실까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했다.
찾아가서 아버지께 공연 표를 드려야 하는데, 일이 바빠서 갈 수가 없었다. 회사의 재정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단돈 몇만 원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공연 날짜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숨통을 조여오는 경제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공연장에 연락해 예매를 취소하고 말았다. 내 손에는 돈 몇십만 원이 다시 쥐어졌지만 가슴속에는 죄송함과 비참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깜짝 선물을 기대하며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아버지를 뵐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자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일을 더 열심히 해서, 빨리 사업을 정상화시켜서 돈을 벌게 되면, 여유를 좀 찾게 되면 그때 반드시 이미자 씨의 공연을 보여드리리라 다짐을 했다. 50주년 공연 다음에는 51주년이나 52주년 공연이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업은 내 의지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얼마 후 아버지는 폐암으로 쓰러지셨고,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이미자를 생각했다. 국화에 둘러싸인 영정을 보면서 나는 이미자를 생각했다. 부여 선산 땅속에 아버지가 묻히시는 광경을 보면서 나는 이미자를 생각했다. 돈 몇십만 원 때문에 예매했던 표를 물리면서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셨던 이미자 공연을 보여드리지 못한 게 이런 한으로 남게 될 줄은 그때 미처 알지 못했다.
그 뒤로 월요일 밤 10시만 되면 〈가요무대〉와 이미자가 생각났다. 아내가 초저녁잠에 빠져 있는 날이면 나는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가 〈가요무대〉를 튼다. ‘동백 아가씨’, ‘신라의 달밤’, ‘눈물 젖은 두만강’이 흘러나오면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온다. 일제강점기와 6ㆍ25전쟁을 겪지 못한 내가 아버지 세대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아버지의 추억을 통해, 아버지의 노래를 통해, 나는 매주 월요일 밤 10시면 아버지와 만나는 것이다. 아버지가 살았던 시대, 아버지가 당했던 슬픔, 아버지가 누렸던 행복과 오롯이 만나는 것이다.
(중략)
나와 다르다는 것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것은 힘과 기쁨과 풍요함이 될 수 있다. 아빠와 아들이 한 뿌리임을 좀 더 일찍 발견한다면 조화로운 삶 또한 보다 일찍 찾아오게 될 것이다. 아빠나 아들 중에 어느 한쪽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그 사랑을 느낀다면 이는 너무 늦다. 살아 있을 때, 내 눈에 보일 때, 그때 소통해야 한다. _‘세대 차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pp.18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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