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병원의 진료실 앞은 늘 자리가 없어 서성이는 보호자들, 간신히 자리를 잡고는 진료 순서가 표시된 전광판만을 바라보는 생기 없는 눈빛들, 기운이 없어 휠체어나 이동형 침대 위에 늘어져 있는 이들로 붐빈다. 진료실로 들어가기 위해 이들 사이를 지날 때면 시선을 돌리지 않고 앞만 바라보려 애쓴다. 그 눈빛들을 마주하면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어서. 대다수의 의사들이 이미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일을 하고 있는데도 왜 이런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것인지, 억울한 마음까지 들기도 한다.
--- p.9, 「머리말」 중에서
진료의 ‘정석’ 중에서 나는 딱 하나만 지켜왔다. 환자와 눈을 맞추는 것. 진료 시간은 짧고, 기록과 처방을 챙기느라 모니터를 주로 봐야 하지만, 적어도 한 번은 눈을 들여다보자는 것이 나의 진료 원칙이었다. 면담과 진찰은 최소로 하더라도 한 번의 눈 맞춤이 최소한 의사에게 무시당했다는 모멸감은 덜어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그게 패착이었음을 최근 깨달았다. 환자의 눈을 보는 것조차 생략했던 어느 날, 진료 속도가 놀랄 만큼 향상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하고도 정시에 마칠 수 있었다. 환자들이 질문을 멈추어서였다. 그들은 궁금한 것이 있어도 묻지 않았다. 아마 눈을 마주치지 않는 상대방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기란 어렵다고 판단해서였을 것이다. …… 눈 맞춤은 ‘나는 당신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을 전달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말할 용기를 얻게 하고, 입을 열게 했다. 바쁜 진료실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정석의 모든 요소를 제거한 초경량, 초스피드 진료를 적용한 이후 나는 40∼50명의 환자도 3시간 안에 거뜬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식이면 다음번엔 70명에도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나도 남들만큼의 생산성을 지니고 있었구나, 하는 안도가 들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난 도대체 무엇을 ‘생산’하고 있는 걸까?”
--- p.19-20, 「의사들은 왜 눈을 마주지 않을까?」 중에서
의료에는 수많은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환자들에게 그 불확실성이 가져오는 나쁜 결과는 매우 치명적일 수 있다(물론 그것을 100퍼센트 차단할 수는 없겠지만). 불확실성을 차단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그러나 정말 그 노력들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느냐 역시 중요한 문제다. 불필요한 검사와 치료는 금전적 낭비일 뿐만 아니라 환자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상당수의 의료 과실과 관련된 소송에서는 ‘환자를 위한 위험과 이득을 따졌느냐’보다는 ‘충분한 검사나 치료를 했는가’가 쟁점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보니 의사 입장에서는 고심해서 안 하는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일단은 뭔가를 하고 보는 쪽을 택하게 된다. 응급실같이 결정할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 p.40, 「과잉 진료는 왜 일어날까?」 중에서
환자의 질문은 이렇듯 양방향으로 의미가 있다. 환자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는 데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의사에게는 환자들이 궁금해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짧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미리 물어봐야 할 내용을 적어보는 것이 좋다. 여러 질문을 다 할 수는 없고, 우선 가장 궁금한 것 두 가지 정도만 정해보자. 한 가지는 너무 적고 세 가지를 물어보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그리고 본인이 궁금한 것을 묻는 것뿐만 아니라 의사가 궁금해하는 것도 말해줘야 한다. 의사는 당신의 증상 중 어떤 부분이 가장 불편한지가 궁금하다. 이것도 두 가지를 정해보자. 시간 순서대로 두서없이 증상을 나열하기보다는 제일 불편한 것, 그다음 불편한 것 두 가지를 순서대로 말하면 효율적으로 진료 시간을 쓸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바보 같은 질문은 없다. 그러므로 수준 낮은 질문일까 봐 덧붙이는 말들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궁금한 걸 단도직입으로 물어봐도 의사들은 대부분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간단하고 명료하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는 환자를 오히려 좋아한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단 미리 준비해서 요점 위주로 질문하라.
--- p.123-124, 「궁금한 내용은 미리 메모하라」 중에서
의사에게 영업용 미소까지 장착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환자 입장에서 담당 의사의 굳은 표정이 얼마나 큰 불안과 좌절을 안기는지는 사실 몇 번 안 되는 환자로서의 경험을 떠올려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하물며 암이라는 위중한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의사의 말투, 몸짓 하나하나의 의미는 그의 마음에 알알이 들어와 고통스럽게 박혔을 터였다.
어떤 환자의 말과 행동이 내 맘에 들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는 환자고 나는 의사다. 권력이 절대 균형을 이룰 수 없는 관계. 그의 몸에 대해 그 자신보다 속속들이 알고 있고, 그 몸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검사와 치료들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사람으로서 나는 적어도 그보다는 더 신중했어야 했다. ……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다. 비록 표정은 떨떠름했지만, 마음은 그보다 더 많이 죄송했노라고. 그리고 당신이 터뜨린 분노는 나를 더 생각하게 하고 성장시켰노라고.
사실 일상 속에서 이 일의 무게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쉽게 경거망동하게 되고, 그러다가 깨지고 배운다. 처음부터 좋은 의사면 좋겠지만, 부족한 나라는 인간은 환자와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고 후회하는 과정을 통해 배운다. 그러면서 이전보다 조금 더 나은 의사가 되어간다. 이제는 그나마 예전보다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세상엔 배울 것이 많다.
--- p.197-199, 「나는 오늘도 상처를 주고받으며 성장한다」 중에서
그날 실습에 참여했던 그 여학생은 표정과 몸짓, 말투에서부터 다정함과 사려 깊음이 묻어나는 친구였다. 대개의 다른 학생들과 같이 도입부, 환자의 질병에 대한 인식 확인, 나쁜 소식을 예고한 뒤 명확히 전달하는 것까지는 잘했다. 대개 문제는 환자가 감정을 터뜨린 이후에 벌어진다. 슬픔과 분노가 몰아치는 동안 학생은 뭐라 말을 잇지 못했고, 겨우 더듬거리며 치료 계획을 설명하겠다고 말을 꺼내었지만 어린 자녀를 걱정하는 모의 환자의 이야기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모의 환자와의 면담이 끝나고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연기에 몰입해서 면담이 종료되기 직전까지 눈물을 흘리던 모의 환자는 눈물로 가득한 학생의 눈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는 순간 이윽고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이게 가짜라는 걸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슬플까. 민망하면서도 방금까지 몰입하고 있던 그 순간의 슬픔이 털어지지 않아, 웃다 울기를 반복하다가 서로를 위로하는 기이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 p.202, 「나쁜 소식 전하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