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오프너의 ‘선을 넘어버렸다.’ 주방이나 거실에 자리하면서 와인 병을 따는 행위나 와인오프너의 존재방식을 새롭게 규정하는 문화적인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이런 시도는 1990년대 이후로 세계 디자인의 흐름을 바꾸었다. 디자인은 그저 기능성만을 챙기는 분야가 아니라 문화를 만드는 일로 승화되었다. 〈안나 G〉가 등장한 전후로 세계 디자인은 점차 기능주의와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고,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은 디자인에 담긴 매력이나 가치를 통해 정신적인 만족을 이끌어내는 디자인들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
--- p.14, 「알레산드로 멘디니」중에서
기내식기답게 무게를 줄이고 실용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디자인되었는데, 마르셀 반더스는 그런 제약 사항을 충족시키면서도 지극히 고전적인 장식미로 디자인을 마무리하고 있다. 종이나 플라스틱, 도자기, 스테인리스 스틸 등 일상에서 많이 쓰는 재료들로 만들었으면서도, 그 표면에 새겨진 무늬나, 꽃잎처럼 처리된 그릇, 액자를 연상시키는 트레이 등은 이 작은 기내식기에 차분한 고전미를 더하고 있다.
--- p.33, 「마르셀 반더스」중에서
부조의 얼굴이 약간 섬뜩할 수도 있는 이미지를 지니면서도 그 주변을 둘러싼 드로잉이 천진난만한 느낌이라, 오히려 화병 전체에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부여한다. 이런 중의적이고 은유적인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매료시킨다. 혼란스럽고 애매모호한 동시에 보는 이의 잠재의식을 강렬하게 건드리는 이상한 느낌. 이것이 디자인인지 아닌지를 떠나 그 이상한 느낌이 뇌리에 새겨져 계속 되돌아보게 만든다. 피카소나 후안 미로 같은 선배 스페인 작가들의 작품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초현실주의적 솜씨이다.
--- p.38~39, 「하이메 아욘」중에서
3년간 나무의 생태를 연구해서 디자인했다는 이 의자는 마치 나무가 자라난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이 의자의 바닥이나 등받이의 형태는 나무나 식물의 불규칙한 조직을 닮아 있다. 언뜻 나뭇가지들이 아무렇게나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당히 단단하게 구조화되어 있다. 이런 구조적 처리로 인해 플라스틱 재료의 산업적이고 인공적인 분위기가 완화되면서, 자연에 다가가는 느낌이 실현되고 있다.
--- p.67-69, 「부홀렉 형제」중에서
〈로버〉는 로버 자동차의 낡은 시트와 몇 개의 파이프 구조를 떼어와 만든 소파로, 론 아라드의 초기 디자인 작업이다. 재활용에 대한 실험이라고 볼 수 있을 이 디자인은 새로운 것을 생산하여 상업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함축된 디자인이었다. 기능주의 디자인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시기에 등장한 이 작품은 새로운 디자인의 물결이 일어나는 데 일조했고, 그의 존재감을 세계적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p.73~74, 「론 아라드」중에서
이렇게 단 하나의 색으로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것은 단지 감각만 좋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색에 대한 많은 경험과 학습이 선행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의 디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색 감각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형태를 다루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다시피 향수병이나 세면대는 색의 매력은 차치하더라도 모두 아름다운 곡면으로 디자인되었으며 이 유려한 형태는 그의 디자인 대부분이 공유하는 특징이다.
--- p.88-89, 「카림 라시드」중에서
원기둥이나 육면체와 같은 다듬어진 조형적 질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게다가 유연하게 흐르는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이 생수병의 디자인은 그냥 막 만들어진 덩어리로 보인다. […] 생수병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 그냥 그대로 멈춘 것처럼 보인다. 불규칙한 형태가 생수병의 플라스틱 냄새를 완전히 벗겨내고 맑고 깨끗한 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기하학적인 형태들이 대체로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나온다면, 이런 유기적인 형태들은 자연으로부터 나온다.
--- p.103~104, 「로스 러브그로브」중에서
〈비너스〉 책장은 파비오 노벰브레가 자신의 고전주의 전통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책장 안에 그리스 시대의 조각을 실제 크기로 진짜 넣어버렸다. 그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놀랍기만 하다. 어렵게 이루어지는 창조가 아니라 이처럼 발상을 살짝 바꾸어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 큰 감동을 자아낸다. 이 책장은 그간 책장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무색하게 만든다.
--- p.115, 「파비오 노벰브레」중에서
동그란 몸통이 거울처럼 주위의 모든 경관을 반사하는 미러볼 조명을 보면 폐차장을 뒤지던 젊음을 느낄 수 있다. […] 이 조명의 몸체는 놀랍게도 플라스틱이다. 그렇기에 높은 곳에 이 조명등이 여러 개 매달려 있어도 위험하지 않다. 또한 이 조명은 하나만으로 단독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크기가 다른 조명들을 여러 개 매달아 사용할 수도 있다. 어떻게 사용하든지 이 조명의 미니멀하면서도 번쩍거리는 질감은 훌륭한 현대 조각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 p.157, 「톰 딕슨」중에서
엄밀히 말하면 이 조명을 구성하는 깨진 접시 조각들은 폐기물들이다. 당장 쓰레기봉투에 넣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완전히 다른 용도의 물건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단순한 재활용이 아니라 속성이 다른 존재로 재탄생한 것이다. 허공에서 폭발하는 듯한 접시 조각들이 최신의 조명이 된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닌가.
--- p.235, 「잉고 마우러」중에서
당시에 그를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로 만들어주었던 것은 세 개의 긴 다리와 원추 모양의 몸체로 이루어진 레몬즙 짜는 도구 〈주시 살리프〉였다. 둥근 쐐기 같은 알루미늄 덩어리에 가느다란 선적 구조의 다리가 붙은 모양이 세상에 등장하자마자 열화와 같은 인기를 얻었다. 첨단의 기술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기능을 가진 것도 아니었지만, 오징어 같기도 하고 곤충 같기도 한 그 모양이 어떻게 그토록 매력을 발산했는지 세계 디자인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어엎으면서 1990년대를 대표하는 디자인으로 등극했다.
--- p.260, 「필립 스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