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모든 글은 시詩로 출발하지만 시에 이르지 못한 것은 산문이 되고 산문이 되지 못한 문장들은 텃밭에 거름으로 보탰으니 숱한 밤을 지새운 시간들이야 억울할 것이 없다. 모처럼 사진 없는 여행 산문을 선보인다. 비로소 ‘보는 여행’에서 ‘생각하는 여행’으로 안내할 수 있게 되었다.
체 게바라였던가, 가보지 않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상상하는 일이 가능하냐고? 내 답은 불가다. 경험 없이 지식이나 머리로 얻은 것은 진짜가 될 수 없다는 믿음. 나에게 여행은 가짜가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여행자의 시간을 반납하고 숲 가까운 곳에 정주를 결심한 후 단순한 일상을 누리는 현재의 삶을 ‘그린 노마드’라 정의하고 싶다. 매일 매 순간이라는 선물, 남루조차 평온으로 이끄는 여여, 이 책은 숨어있는 우리 모두의 자아, 혹은 지금과는 다른 여행을 꿈꾸는 그대의 주머니에 가만히 넣어주고 싶은 나의 작은 메시지다.
---「머리말」중에서
하루는 부겐빌레아 울타리 앞에 선 채 물었다. “킴, 이 섬에서 가장 좋아하는 게 뭐예요?” 나는 눈앞의 꽃을 가리키며 “부겐빌레아.”라 즉답을 했다. “다음은요?” 그가 차분하게 내 입에서 어떤 말이 흘러나올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답을 기다렸다. “매일 아침 무함마드가 가져다주는 커피….” “정말요? 그럼 퀸이나 밥 말리의 노래도 좋아하나요? 이 섬이 그들의 고향이란 건 알고 있죠?” 무함마드는 조금도 경솔하지 않게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하는 듯했다.
---「1부 ‘잔지바르의 무함마드’」중에서
여행은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을 몇 시간 혹은 며칠로 축약한 압축파일 같은 건 아닐까. 좋은 여행지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의 의미란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틈이고 쉼인 동시에 피안의 문을 여는 일종의 열쇠 같기도 하다. 그것이 차(커피)가 가진 힘이 아니고 무엇이랴.
---「1부 ‘딤푸스 마을의 그녀’」중에서
달빛 아래 사하라사막에서 노숙, 낮 동안 따듯하게 데워진 모래밭을 맨몸으로 뒹굴어 보는 것, 바간의 달밤은 또 어땠는가. 루앙프라방 메콩강 물에 각 나라 여행자들과 하나로 어울려 몸을 적시고 비 오는 마날리 숲에서 느꼈던 짜릿함, 말라위 호수에서 원시 처녀들과 백인 노부부와의 물놀이, 리우의 새벽 바다를 온몸으로 헤엄치던 날들, 그 순간순간들이 문화와 관념과 권태라는 일상적 감옥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하게 한 유일한 희락이었음을, 마음보다 몸이 먼저 늙어가는 지금, 한때나마 꿈꾸던 원시야만의 삶, 내추럴리스트가 되고자 했고 내추럴리스트였음을, 비로소 고백하는 나는,
---「1부 ‘내 꿈은 자연주의자’」중에서
니체는 호흡이 긴 인간만이 마침표를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마침표는 허세를 부리는 것에 불과하다. 문체는 그가 자신의 사상을 믿고 있으며, 사고할 뿐만 아니라 느끼기도 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 니체가 언급한 문체론의 요점이었다. 나는 니체의 문체론에 기대 창조적인회화는 시에 가까이 다가가되 결코 시로 넘어들어 가서는 안 된다는 회화론을 마련했다. 시적인 섬세한 감정과 재능이 없이는 어떤 예술도 새로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 나는 피카소에게, 그리고 스페인의 화가들에게 미리 경배하지는 않기로 했다.
---「2부 ‘프라도에서 만난 피카소’」중에서
이럴 때 혼자 있는 외로움은 얼마나 달콤한지, 아무리 여행이 힘들어도 혼자 외로울래? 함께 시끄러울래? 하고 물으면 나는 전자를 택할 것이다. 본시 외로운 게 인생이라는데 여행이라고 다를까.
---「2부 ‘바퀴만큼 유혹적인 존재가 있을까’」중에서
“그림자가 네 키만큼 자라면 하던 놀이를 멈추거라, 그림자가 네 키의 한 배 반쯤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그림자가 네 키의 두 배 이상 길어지면 곧 어둠이 내린다는 신호이니 그때는 귀가를 서둘러야 한다.” 시계를 가질 수 없었던 시절, 내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주신 자연시간이다.
시간이 흘러 조그만 계집아이는 여행자가 되었고, 아프리카 작은 시골마을에서였다. 다음 날 아침 10시 같은 장소에서 만나 뭔가를 전해주기로 노인과 약속을 했을 때 나는 시계가 있었지만 시계가 있을 리 없는 옆 마을 노인은 어떻게 약속을 지킬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날 나는 고개를 기우뚱하며 헤어졌고 다음 날 아침 시간에 맞춰 비닐 가방 하나 챙겨 약속 장소로 나갔더니 방금 도착한 노인이 반갑게 아침 인사를 했다. 노인의 시계는 자신이 있는 곳 어디서나 해만 뜨면 볼 수 있는 자신의 키, 나무, 우물, 담 등등 해를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였던 것, 대신 밤에는 달의 크기나 기울기로 날짜와 시간을 계산하고, 심지어 몇 달 후 자식의 혼사를 치르는 날조차 그렇게 정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준다니 그들의 삶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얼마나 지혜로운가.
---「3부 ‘자연의 시간’」중에서
나흘간의 출가, 안개와 싸락눈 속에서 걷다가 멈추다가 춥고 배고프면 숙소로 돌아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몸이 따듯해지면 다시 숲으로 들어가 걷는 명상으로 각자가 안고 있던 시간의 상처를 위무했다. 우리가 쉴 때는 눈이 그치고 걷기 시작하면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는 신기한 일이 나흘이나 반복적으로 지속된 이변은 설명할 길이 없다. 월정사에서 가장 오래 본 것은 흩날리는 눈발과 천년의 숲으로 모여든 참새 떼였다. 그 많은 새떼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누가 저들을 먹이고 살펴 하늘과 숲을 경계 없이 넘나들며 춤추게 하는지. 우리의 재회도 때가 되고 연이 닿아 이루어진 거라면 그들도 때가 되었으므로 우리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그곳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3부 ‘7년 만의 재회, 나흘의 출가’」중에서
여행지에선 누가 들여다본들 그 내용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로움을 그들은 알고 있었고 즐겼던 거지, 그런 거였어. 여행은, 숨기지 않아도 되고 숨길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유로움, 제 자리로 돌아오면 그때 비로소 꿈처럼 아득해지는, 어제는 너무 멀고 내일은 너무 아득한,
---「3부 ‘어제는 너무 멀고 내일은 너무 아득해’」중에서
마사이추장 말로는 나무 뒤쪽으로 큰 마을이 있었지만 폐허가 된 지 5년 정도 됐단다. 물이 없으니 사람은 물론 가축을 키울 수 없어 먼 곳으로 풀을 찾아 유목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지금은 아이들에게 공부도 시킬 겸 정주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다고, 예전엔 정주가 싫어 유목을 했다면 지금은 정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현실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추장에게 저 벌통의 꿀은 마지막으로 언제 땄냐고 물으니 3년은 된 것 같다며 말끝을 흐렸다.
한동안 여행자로 살면서 환경재앙은 지구 도처에서 수없이 확인해 왔고 저 사막화 현상은 아프리카뿐 아니라 중국 인도 몽골 중앙아시아 등에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갈 수 있는 세상은 요원한가. 기름진 음식을 집에 앉아 손가락 하나로 해결하고 안락한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면 높아지는 쓰레기산에서 나만 가라앉지 않으면 된다는 사고를 가진 우리의 내일은 어디로 가는가. 지구상에서 가장 용맹하다는 마사이들의 꿈, 저 죽어가는 아카시아 나무를 회생시킬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3부 ‘아프리카 아카시아가 주는 메시지’」중에서
비어있다는 것, 오래되었다는 것, 황량하다는 것, 숱한 역사를 안고 사라졌으나 영 지워지지 않는 그 무엇들, 세월이 흘러 모두가 평면으로 잔잔해진 이곳 폐사지, 기단을 둘러싼 돌도 나무도 심지어 새들도 고요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절대 고요, 그것을 대변하는 조형물, 바로 폐사지에 남아있는 고고하기 이를 데 없는 석탑이 아닐까 싶다.
---「4부 ‘부론 가자 거돈사지 가자’」중에서
풍경이 요란하면 염불에 방해가 될 것이고 풍경을 거두면 물속처럼 적막할 테니, 할 수만 있다면 그 소리는 도드라지지 않되 청아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 소리야말로 풍경의 재질과 형태, 탁설과 바람 등등 많은 자연적 요소들의 합일 테니 매일 같은 장소 같은 풍경이라도 소리는 다를 수밖에. 유독 수선스럽거나 아니면 차분하고 은은하게 들릴 때가 있다면 그것은 풍경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이의 마음이 아닐까. 가끔은 불심 없는 나도 풍경 소리가 그리워 사찰을 찾을 때가 있으니 사찰에서 풍경의 역할은 그리 작은 게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4부 ‘수덕사 목어와 풍경 소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