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사람, 공정, 평화, 한반도, 상식, 깨어 있는, 정의, 개혁, 민주, 서민, 우리 아이들, 민족, 시민 같은 두루뭉술한 말들에 취한 채 그 속에서만 사는 것 같았다. 국회는 사회적으로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결정하라고 만든 곳일 텐데, 정작 그런 첨예한 문제는 미루기만 했다. 차별금지법 제정, 중산층 증세, 노동자 정년 조정, 국민연금 개혁, 기후위기 대응 따위의 문제 말이다. 그들은 선거 이후에 결정하자고 했지만, 한국 정치는 늘 선거 전이거나 선거 직전이거나 둘 중의 하나다.
--- 「들어가며」 중에서
86들의 정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동시대 정치인이나 지식인도 아니고, 카를 마르크스도 물론 아니고, 김일성도 아마 아니고, 어쩌면 박정희일 것이다. 그들의 유년 시절을 내내 지배한 박정희는 86들이 국가의 역할을 이해하고 공적 자아를 형성하는 방식 자체를 결정했다. 물론 86들은 박정희와 반대 방향으로 나라를 만들어나가고자 전력을 다해 뛰었지만, 뛰는 방법과 호흡법은 꽤나 닮아 있었고 결국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도 어쩌면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 「1장 박정희의 아이들: 정상국가 콤플렉스」 중에서
그런데 박정희의 죽음과 전두환 집권이 포퓰리즘 계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86포퓰리즘의 태동을 설명하기 위해선 하나의 문제가 더 풀려야 한다. 주체의 문제다. 당대의 대학생이었던 86들은 어째서 스스로 민중을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들은 ‘박정희의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86들은 결손국가인 조국을 근대화해야 할 책임이 있는 주체로 키워졌고, 자아를 국가와 민족과 분리하지 않은 채로 자라났다. 물론 동시대 어린이들이 다 그런 프로젝트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박정희 시대에 모범생으로 자라 명문대 학생이 된 86들은 이 프로젝트를 유독 훌륭히 마친 자들이었다. ‘진선미의 화신’으로서, ‘민족중흥’과 ‘구국’의 주체로서 자격을 갖춘 것이다.
--- 「2장 깨달음: 86포퓰리즘의 태동」 중에서
86포퓰리즘은 민심의 불가해성 문제를 독특한 방식으로 오독한다. 그들은 민심을 ‘표출된 문제’와 ‘본질적 문제’의 이중구조로 이해한다. 대중이 당장 요구하는 문제 밑에는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별도의 과제가 따로 있다. 대중이 표현하는 여론은 혼란스럽고 급변할 수 있지만 진짜 문제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중은 투쟁의 경험이 없고, 외세와 독재정권에 의해 억압받고 있어 ‘본질적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운동가는 먼저 깨달은 자로서 대중의 일상적 불만이 운동으로 이어지도록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그 과정에서 ‘본질적 문제’를 깨닫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보았다.
--- 「3장 86포퓰리즘의 역사: 역사·민중·대표의 재구성」 중에서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국민을 ‘위임으로서 대표’할 방법이 없을 때는 ‘체현으로서 대표’하는 것이 그나마 가능하다. 독재권력 역시 본인들이 스스로 국민을 체현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방식의 체현들이 경쟁하는 구도가 된다. 그러나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의제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시작할 때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위임 의사를 더 직접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더 큰 열망을 품게 된다. 선거는 갈수록 정치적 열망의 중심이 된다. 선거의 구심력이 작동한다. 하지만 86들은 이 시점까지도 형식적 민주주의가 강제하는 유연성과 선거정치의 구심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 「4장 두 개의 민주주의: 민주정부와의 경쟁」 중에서
‘국민’과 ‘시민’의 관계는 이해관계의 대립이 아니라, 아직 진정한 이해를 깨닫지 못한 ‘국민’과 그들을 위해 진짜 이익을 대변해줄 수 있는 ‘시민’ 사이의 계몽적 관계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시민’이 될 수 있는가? 구체적 실천이 필요하다. 올바름과 이로움이 충돌할 때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 많은 투쟁과 고민 끝에 현대 민주주의는 특정한 조건이나 자격 없이도 모든 국민이 같은 주권을 가진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반적폐 포퓰리즘에서는 우리가 진정한 주권을 갖기 위해선 굳이 깨어 있기까지 해야 한다. 이런 민주주의관은 이후 ‘이로움’, 즉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민주주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한계로 이어진다.
--- 「5장 반적폐 포퓰리즘: ‘깨어 있는 시민’의 탄생」 중에서
특히 새로운 세대의 유권자들이 새로운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서면 86들은 어쩔 줄 모른다. 마치 외계인을 처음 만나 어떻게 소통할지 모르는 사람들 같다. 이전 세대들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근대화되기 위해선 전 국가적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이 근대화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대전제하에서, 지지도 비판도 가능했다. 그러나 청년세대들은 정치가 근대화의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년들은 정치가 각자의 필요를 해결해주는 우리 사회의 인프라라고 생각하고, 그러지 못하고 있는 한국 정치를 불신한다.
--- 「6장 용퇴론: 86은 왜 민주주의와 어긋나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