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비유는 좀 수상하다. 예수님 말씀이라지만, 현대 설교자라면 예화를 잘못 사용했다고 지적받을 만하다. 밭에 감추인 남의 물건을 몰래 가져간 자가 하나님 나라의 모범이 된다. 더럽고 하찮은 누룩과 겨자씨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사랑의 모범인지, 아니면 차별과 편견을 깨는 도구인지 초점이 모호하다. 하나님은 자신을 무시한 자를 엄혹하게 심판하거나, 때로는 탐욕스런 고리대금업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포도원 품꾼 비유의 주인은 자애로운 하나님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일찍부터 일한 자를 무시하는 행동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 「프롤로그」 중에서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하여 사랑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그 모범을 보여 주시려는 데 목적이 있었을까요? 곤궁에 처한 자가 당신이 도와야 할 이웃이라는 교훈을 율법사에게 알려 주시려 하였을까요? 만일 이런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은 비유를 좀 잘못 사용했습니다. 이 비유를 듣는 순간 유대인들은 어떤 것에 놀랐을까요? 사마리아인의 ‘친절한 행동’에 놀랐을까요? 아니면 착한 일을 한 자가 ‘사마리아인’이라는 데 놀랐을까요? 후자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것을 사랑의 모범이나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 그 정체성을 규명하려 했다면 오히려 강도 만난 자를 사마리아인으로 만드는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 「선한 자가 선하지 않고 악한 자가 악하지 않다」 중에서
하나님은 생존을 위해서 했거나, 또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작은 악은 용납하십니다. 그러니 작은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다고 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낙담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기억도 하지 않습니다. 생존을 위한 우리 삶의 투쟁이 소중하고 하나님도 이를 인정해주십니다.
--- 「밭에 감추인 보화의 도덕성」 중에서
이 비유의 주인공은 청지기입니다. 그가 취한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실은 현실에서 당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약자들은 현실 세계에서 재산이나 권력이 없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는 지혜, 곧 꾀입니다. 머리를 잘 써야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헤어초크는 이 비유를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였습니다. 그 논문의 제목이 〈약한 자의 무기〉입니다.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취약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서 어떻게 투쟁하는가를 보여주는 비유라는 것입니다.
--- 「약자의 무기, 불의의 청지기의 꾀」 중에서
심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방에서 교회로 들어온 많은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 마치 가라지와 같은 자들 또한 제거하는 심판이 이어집니다. 여기 예복의 정체를 제대로 규명해야 하는데, 마태복음 맥락에서 보면 이는 ‘행함의 예복’입니다. 산상수훈과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자는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 「환대의 식탁 공동체」 중에서
동일한 씨앗인데 밭에 따라 운명이 바뀝니다. 씨앗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재수 없이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의 먹이가 됩니다.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지고 싶어서 떨어진 씨가 어디 있습니까?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우연히 그런 것인데 마치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 마냥 우쭐댑니다. 흙수저 금수저란 말이 여기에 적합합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동일한 능력과 인격인데 주어진 환경에 따라 운명이 불평등하게 전개됩니다. 예수님이 이런 의도로 비유를 말씀하셨다면 곧이어 제자들과 군중들의 질문이 쏟아졌을 것입니다.
--- 「씨가 문제인가 밭이 문제인가」 중에서
그런데 사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이 이 불의한 재판관처럼 느껴진 적이 없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때, 내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문제가 있는데 전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 것 같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마치 벽처럼 느껴집니다. 의인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할 때, 불의한 자가 여전히 큰소리를 치며 부귀를 누릴 때, 불의한 일이 민족과 가족을 덮치거나 역사가 후퇴하고 어리석은 일이 반복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의심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낙담하고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이 완고한 재판관을 무너뜨린 것은 과부의 집요함이었습니다.
--- 「하나님이 불의한 재판관처럼 보일 때」 중에서
유대교 미쉬나에서 전하는 기원전 3세기의 사제 의인 시므온(Simeon the Just)의 말입니다.(Pirkei Avot 1:2) “세상은 다음 세 가지 위에 서 있다: 토라(말씀), 아보다(노동 또는 예배), 헤세드(자비)” 토라는 모세 오경 곧 하나님 말씀이고, 아보다는 노동 또는 예배의 의미이고, 헤세드는 사랑, 자비입니다. 세상을 유지하는 힘은 바로 이 헤세드에 있습니다. 헤세드가 없는 세상이 바로 지옥입니다.
--- 「순종하는 자가 믿는 자다」 중에서
이런 알레고리 방식은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 해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알레고리는 성경이 명백히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멀리 나아가서는 안 된다. 즉 알레고리는 교리를 세우는 작업 앞에서는 멈추어야 한다.”(《기독교강요》 2.5.19) 알레고리를 통해 새로운 계시를 제시하는 방식은 예수님이나 성서만 가능합니다. 이후 교회는 알레고리를 성서를 깊이 있게 묵상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이를 통해 새로운 교리를 덧붙여서는 안 됩니다.
--- 「가라지의 비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