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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삭제, 하시겠습니까?

: 작전명: 판도라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108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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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0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232쪽 | 328g | 140*205*12mm
ISBN13 978895444961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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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지금 내 소켓에는 중학교 3학년까지의 교육과정이 들어 있는 칩이 꽂혀 있다. 중학교 때 배운 모든 정보가 이 칩 안에 들어 있다. 말하자면 교과서인 셈이다. 교과서를 넘기며 글을 읽는 대신 칩을 꽂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정보를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힘들게 외우지 않아도 된다. 만세! 처음 뉴럴 소켓이 개발되었을 때 학생들은 이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환호성을 질렀단다. 뉴럴 소켓을 통해 시냅스 칩의 정보를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과정이 책에서 필요한 정보가 있는 페이지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 p.9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 엉뚱한 일을 해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 집과 학교를 오가며 주어진 미션을 완료하다 보면 저절로 시간이 간다. 가끔 소켓이 오류를 일으키면 무시하고 다시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마 지금도 소켓 오류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지도에 없는 길로 왔으니까. 하지만 진짜로 들어왔잖아. 그럼 실제로 길이 있다는 거 아닌가? 그럼 내가 맞고 소켓이 틀린 건가? 그럴 수도 있나?
--- p.24~25

“지금 네 상태가 건망증이야. 뭔가를 떠올리려고 하는데 기억나지 않는 거. 하지만 인지 장애는 달라. 아예 떠올리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아. 자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 거지. 그게 우리가 말하는 ‘기억 삭제’야. 지금 세상은 거대한 인지 장애를 겪고 있는 거야.”
“세상이, 뭘 잊고 있는데?”
“몰라. 나도 대부분 잊었으니까. 하지만 몇 가지는 알아.”
--- p.46

“이렇게까지 할 거면 왜 사람을 쓰는 거야? 그냥 로봇을 쓰는 게 낫지 않아?”
“그야, 사람이 더 싸니까.”
“사람이 더 싸다고?”
“싸지. 사람이 얼마나 싸고 하찮게 다뤄지는 줄 알면 깜짝 놀랄 거야. 이용당하고, 무시당하고, 지워지고.”
“사람이 사람을 왜 그렇게 대해? 같은 사람이잖아.”
“같은 사람, 이라고 학교에서 배우지. 바로 그래서야. 저 사람들을 우리 눈에 안 보이게 하는 이유. 같은 사람이 그런 취급을 받는 걸 보면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으로 그리고 뇌로 똑똑히 본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편안한 마음으로 학교에 다닐 수 없을 것 같았다.
--- p.57

“잠깐, 잠깐만. 혜나 너 지금…… 우리 부모님이 그때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거야? 운석이 충돌했을 때? 그러니까 십 년 전에? 그때 나만 살아남은 거고? 그런 거야?”
“사망자에 대한 정보는 완전히 삭제되었어. 그러니 백 퍼센트라고 말할 순 없어. 하지만 유수현 네 상황을 보면 거의 확실하다고 해야겠지. 너뿐만이 아냐. 6구역에 부모님이 안 계신 애들이 유난히 많이 살고 있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어?”
해 본 적 없다. 따져 보니 같은 반 친구 중 절반 정도가 혼자 산다. 다른 학교도 다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사실을 슬퍼해 본 적도 없고 아쉬워해 본 적도 없다. 아예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고 살았다. 그게 다 디바인의 생존자 회복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 p.92

장근형은 도시가 그런 식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장근형뿐만 아니라 37구역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굳이 기억을 더듬으면 도시에 12구역이 존재하고 거기에 부자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는 있겠지만,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할 일도 없고 그곳을 궁금해하거나 가 보고 싶다는 욕구조차 생기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이 사는 곳에 만족한다. 그렇게 도시는 평화롭고 평온하다.
--- p.132

“다음번엔 분명하게 선택해야 할 거야.”
나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민중이의 말을 들으니 생각이 더 복잡해졌다. 디바인이 사람들의 기억을 더 이상 조작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잃어버렸던 기억들을 다 돌려줘야 할까. 나는 어떨까. 기억을 되찾고 싶은 건가?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어떤 부모님이었는지를 다시 기억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되면 바로 어제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처럼 견딜 수 없이 슬퍼지는 건 아닐까. 나도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사람들에게 기억을 무작정 되돌려 줘도 될까. 민중이처럼 원치 않는 사람도 있을 텐데.
--- p.156

부모님을 잃은 직후에는 세상이 다시는 내게 웃어 주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나의 절반은 그렇게 느낀다. 돌아갈 수 없는 나날들의 기억을 당장이라도 지워 버리고 싶은 마음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허덕인다. 그런 나를 다른 절반이 다독인다. 나에게는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과거를 깨끗하게 잊고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과거를 잊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르며 나는 아버지가 만들고자 했던 세상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게 많은 말을 해 주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었다. 그 말들은 십 년이 지난 지금, 기억을 지운 삶을 살아 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해되었다.
그게 아버지가 꿈꾸던 뉴럴 소켓의 기능이었다.
--- p.19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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