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에 태어났거든요. 어머니가 여리고 고운 분이에요. 넷째 달이라 애써 열성을 가지고 내 이름을 짓겠다는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우겨서 지었죠. 연두색같이 살라구요. 종갓집 넷째 딸이거든요. 건성으로라도 산모나 아기의 건강이나마 물어오지 않았다더군요. 어쨌거나 집안에 아기가 새로 태어났는데 서운함을 넘어서서 노기 띤 분위기였대요. 연두색.....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이 뒷방에서 나를 안고 망연히 뒤뜰을 내다보는데 집안 분위기랑은 상관없이 계절은 빛났었겠죠.
그래서 연두야, 연두야 했대요. 어머니가 나를 쳐다보며 자주 부르니 그게 내 이름이 된 거구요. 그 집구석의 모든 것들, 지금도 나이 팔십이 넘어서까지 전국의 유림들이 성균관에 모여 무슨 시답잖은 모임 같은 걸 하면 열 일 젖히고 달려가는 조부나 지금껏 나와 나눈 대화가 채 스무 다미도 안 될 조모, 하다 못해 그 집에서 나는 오래된 한옥 냄새나 순종적이기만 누렁이까지 그 집의 모든 공기, 모든 살아 숨쉬는 것들이 다 싫은데 난 내 어머니와 내 이름만은 미워하지 못하죠. 하긴, 이름같이 못 살고 있긴 하지만요.
--- p.44
이제 괜찮니? 토비의 체온이 따스하면서도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래 , 우리 힘들더라도 참으면서 함께 살자. 모두 다 가질 수는 없는 거야,개든 사람이든 그렇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킬 것인지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인 거야.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데 갑자기 토비가 버르적거렸다.
--- p.135
''연두씨, 그런데 연두씬 왜 피스타치오를 좋아하죠?''
''예?''
''왜 좋아하냐구요, 이걸.''
''아하, 그런 질문 너무 새삼스럽네요. 우선은 맛있어요.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땅콩보다 맛이 깊죠. 야생의 맛이라고나 할까... 왜 열매 종류들이 세상에 많고 많은데 그중에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건 제한되어 있잖아요. 아마 식용으로 쓰지 않는 그 모든 세상의 열매들이 미처 여물기 전에는 다들 이런 맛을 낼 것 같애요. 조금 씁쓰레하면서도 고소한. ...... 날콩 먹어보셨어요?''
''아뇨. 비린 맛이 나서 못 먹잖아요. 게다가 무슨 독도 있고.''
''아주 날것은 그렇죠. 하지만 콩을 그저 살짝만 익히면 피스타치오 맛과 비슷한 맛을 내요. ...... 이유를 대자면야 많죠. 생긴 것도 맘에 쏙 들어요. 무슨 파충류의 알 같지 않아요? 알 속에 들어 있는 고 녀석을 보면 왜 색깔도 그렇고 쭈글쭈글 하고, 게다가 이름은 좀 멋져요? 무슨 파충류라고 했지만 그 이름을 알고 나니 세상에 피스타치오라는 생물이 존재하는 것만 같아요.
''아,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이 껍질이 맘에 들어서예요.''
''껍질이요?''
''예. 몸에 꼭 맞잖아요. 몸에 꼭 맞으면서도 은행알처럼 답답하게 막혀있는 것도 아니고... 이 녀석이 부러워요. 이렇게 몸에 꼭 맞는 집에서 숨구멍만 터놓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 pp.48-49
성인이 된 후, 오로지 나의 경제력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한 세 가지가 있었다. 나만의 공간,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을 참지 않아도 좋을 문화적 여유, 기동력을 발휘할 자가용 승용차. 그것이 남자를 갖는 것보다 우선이었다. --- p. 14
회사에서의 여직원은 딱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영계와 노계. 노계 중에서 대외홍보용으로 키울만한 몇몇의 발군의 인재만이 대리도 되고 과장도 된다. 나머지는 결혼과 동시에, 자동 포장되어 상자에 담기는 공산품처럼 줄 맞춰서 퇴사하는 것이다. --- p. 74
친구들은 이제 거의 누군가의 아내 아니면 남편이었고, 동시에 부모, 혹은 누군가의 애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런 역할들의 중첩성에 허덕허덕했다. 또한 동시에 역할의 중첩성이 유한한 인생에 끼치는 무리와 기만을 번개처럼 알아채고는, 안이한 마음으로 궤도를 이탈했던 과오에 대해 금세 쓰라린 후회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왜냐하면 축복의 소란으로 인한 초기의 무분별한 흥분이 가라앉고 나면, 소위 자신들이 택했다는 생의 안전한 내부는 파고들수록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진리가 날이 갈수록 뼈저리게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 p.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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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견하잖아요. 숨은 쉬어야 하니까 틈을 주긴 주되 결코 내 세계를 보이지 않겠다는 뚝심. 나는 밖을 다 헤아리고 있지만 밖은 나를 헤아리지 못하는 구조. 블라인드나 구식 변소 아랫창처럼요. p.62
아마도 내가 정신적으로 독립했다면 그 순간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영혼의 구원을 대신 받아 줄 수 없는 것처럼 내 밥도 누가 결코 대신 먹어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나와 더불어 굶기를 선택할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하루하고도 반을 굶고 자리에서 일어난 후 나는 다시는 과식이나 밥 굶기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p.83
이제 영화는 끝났다. 준비도 없이 훌쩍 떠나려 했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혼자서 내 부서진 조각들부터 주워 맞출 일이다. 어둠은 더 깊은 어둠으로 밝혀지지 않는 것이다.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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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미쪽이나 이태기계의 사람 이름을 생각했는데, 그녀는 동물이란다. 그것도 파충류의 ......찬피동물,김연두.
'아,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이 껍질이 맘에 들어서예요.'
'껍질이요?'
'예. 몸에 꼭 맞잖아요, 몸에 꼭맞으면서도 은행알처럼 답답하게 막혀있는 것도 아니고......이녀석이 부러워요. 이렇게 몸에 꼭맞는 집에서 숨구멍만 터놓고 살았으면 좋겠어요.이집은 너무커요.'
--- p.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