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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내가 가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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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1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276쪽 | 332g | 133*200*20mm
ISBN13 9788954696456
ISBN10 895469645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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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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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진심은 진심이라서 한심했다. 어떤 진심은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 속 복숭아처럼 쇠 냄새를 풍기며 삭았다. 어떤 진심은 추해졌고 어떤 진심은 다만 견뎌내는 삶으로 전락했다.
---「어떤 진심」중에서

나는 여자를 떠올린다. 사과하러 간 내가 자꾸 벨을 누르자 베란다 문을 열고 뛰어내리려 했던 여자. 여자는 십일층에 살았고 내 사과가 그녀를 또 한번 죽일 뻔했다. 내가 살인자가 되지 않았던 건 여자가 휠체어에서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토리를 잃었고 다리를 잃었고 아기를 잃었다. 언젠가 오빠가 출소해 여자를 찾아간다면, 여자의 집에 찾아가 문을 따고 들어선다면 여자는 벌떡 일어나 도망칠 수도 베란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 수도 없다. 나는 오빠가 감옥에서 죽었으면 좋겠어. 어떤 진심은 아무리 기를 쓰고 틀어막아도 새어나가고 만다.
---「완전한 사과」중에서

최근까지 선생님이었다면서 정말 모르세요? 이럴 땐 최대한 평범하게, 누구 눈에도 띄지 않게 있어야 한다고요. (……) 그렇게 버티면 결국 다 지나간다고요. 처음에 동주한테 관심 가진 이유가 뭐였든 애들은 금방 잊어버리니까, 눈에 띄는 다른 아이라면 얼마든지 또 있을 테니까. 다음 표적으로 옮겨갈 때까지 기다리라고요? 동주 엄마가 한숨을 내쉰다. 아주 낮고 느리고 끈질긴, 듣는 사람의 폐가 다 납작해질 것 같은 한숨이다. 저 집요한 숨이 두 번만 더 흘러나오면 나도 모르게 네, 알겠어요, 그럴게요, 답하게 될 것만 같다. 그게 뭐가 나빠요? 동주 엄마가 묻는다. 내 아일 지키려고 잠깐 비겁해지는 게, 그게 뭐가 나쁘죠?
---「완전한 사과」중에서

소문 속에서 나는 승규의 정강이를 걷어차기도 하고 승규를 등뒤에서 힘껏 떼밀기도 했다. 학교 복도나 급식실에서 했다면 대수롭지 않을 행동들이었으나 난간이 없는 옥상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만큼 당했으니 동주 걔도 한 번쯤은. 암만 억울해도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 누군가는 동조하고 누군가는 비난했다. 매일매일이 소란했다.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애도의 방식」중에서

여자가 함박스테이크를 주문한다. 구운 파인애플을 도막도막 잘라놓고 먹지 않는다. 노른자를 터뜨려 끼얹은 고깃덩어리를 죄다 으깨놓고 먹지 않는다. 여자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비린 것을 물고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동주야. 여자는 내가 지나다닐 때마다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나는 못 들은 척 움직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접시를 치우고 덜걱대며 테이블을 닦는다. 간이 싱크대에서 찻잔을 씻다가 커피잔을 하나 깬다. (……) 음식에다 이게 뭔 짓이야. 너 진짜 모르는 사람 맞지? 몰라요. 나는 진심을 담아 말한다. 알 리가 없다. 이미 으깨진 것을 기어코 한번 더 으깨놓는 사람의 마음 같은 건.
---「애도의 방식」중에서

남자가 여기, 이 침대에 앉아서 울었나? 여기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았나? 저 의자에 발을 얹고 누워 고함을 질렀을까? 방안의 모든 사물이 돌연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남자의 흔적이, 체액이, 지문과 체온과 축축한 숨 같은 것이 남아 집요하게 하진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하진은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몸을 숨길 수 없었다. 남자가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집안 모든 곳에. (……) 하진은 온몸을 짓누르는 공포 속에서 깨달았다. 남자의 침입으로 인해 하진은 자신만의 내밀한 공간을 상실했다. 남자는 아무것도 부수지 않는 방식으로 하진의 공간을 완전히 훼손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딱 한 번의 침입만으로.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중에서

―반성하고 있다고,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울면서 빌더라. 너를 쫓아갔다가 정말 우연히 비밀번호를 알게 된 거래. 조교 그만두고 휴학도 하겠단다. 사람이 한 번 실수할 수도 있지 굳이 징계까지 해서 원한 살 일이 뭐가 있니. (……)
―……이사한 집에 그 사람이 또 찾아오면요?
하진이 말했다. 물기가 흐르는 선득한 손이 이마에서 뺨으로, 턱으로 움직였다.
―딱 한 번 실수한 거라면서 다음 집에도, 또 다음 집에도 찾아오면요?
하진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낮아졌다.
―그러다 그 사람도 엄마처럼, 딱 한 번만 나를 죽이려고 하면요?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중에서

―나는 저 소리가 뭔지 알아. 저게 뭘 의미하는 건지, 나는 알아.
유영이 말했다. 하진이 유영의 팔을 끌어안듯 붙잡고 주저앉는 바람에 유영이 휘청거렸다. 하진이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 위에서는 너무 많은 것이 부서졌고 더 많은 것이 깨졌다. 사물은 쓸모없어졌을 것이고 공간은 결코 안전할 리 없으며 그 안의 누군가는, 그 안의 누군가는. 가지 마. 하진은 그렇게 말했다. 스스로의 비겁함에 몸을 떨면서도 유영을 붙잡았다.
―나는 그때, 매일매일 기다렸어.
유영이 하진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말했다.
―누가 나를 도와주기를, 누가 딱 반 뼘만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봐주기를. 비명을 지르면 더 많이 맞으니까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매일 생각했어. 제발 누구라도, 아주 잠깐만이라도 나를 숨겨달라고.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중에서

주님께서 가장 귀히 여기는 자, 가장 어여삐 여기는 자를 먼저 데려가심이니. 고모의 머리에 손을 얹은 황목사가 그렇게 말했을 때 고모는 드디어 입을 뗐다.
―왜요? 우리 세연이는 주님을 믿지도 않았는데 왜 그애를 어여삐 여겨요? 왜 함부로 데려가요?
세연이 죽은 뒤에야 고모는 황목사에게 의탁하는 걸 멈췄다. 엄마는 드디어 고모가 마음을 바로 세운 거라 기뻐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바로 세워질 마음이었다면 세연을 그렇게 방치하지 않았겠지. 그토록 어린 세연이 남의 집 차가운 현관 앞을 서성이며 관심을 구걸하게 내버려두지 않았겠지. 비루한 세연을 보지 못했던 고모가 죽어버린 세연이라고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이것 봐. 고작해야 보이스피싱범에게 돈을 내주고 속이 시원해졌다느니 하는 꼴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연아, 봐. 이 한심한 꼴을 좀 봐. 네 엄마는 아직도 돈으로 평안을 사고 우리 엄마는 여전히 선인 놀이에 빠져 있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움직였다. 박차를 가하듯 세게, 더 세게 의자를 밀었다. 끼익 꺽 비틀린 소리를 내던 흔들의자는 몸통이 눈에 띄게 기우뚱해진 뒤로는 오히려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미워하는 일」중에서

―엄마는 언닐 이용해 동정표를 얻어보겠다는 심산이야. 서른이 넘도록 사고만 치고 다니는 모자란 딸을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지역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견실한 삶을 살았다, 그런 걸 내세우고 싶은 거겠지. 언니가 그간 사기당한 내역만 줄줄 읊어도 설득력 있을걸. 다단계에 속아 전세금 날린 거며 남자한테 속아 사채 쓴 거며 종교 시설에 끌려가 감금당했던 거며.
―……
―근데 그런 건 이유가 안 돼.
베란다 문이 조금 열렸는지 바람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테이블 위에 쌓인 종이들이 파르륵 몸을 떠는 것도 같았다. 너의 동생이 말했다.
―학대는 그냥 학대야. 거기엔 어떤 이유도 붙으면 안 돼.
---「미도」중에서

내가 보기에 언니는 불행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 같았다. 기를 쓰고 히든 크레바스에 몸을 던지는 사람. 어떤 의지나 신념 때문이 아니라 그냥 거기 구멍이 존재하니 빠지고 보는 사람. 더욱 최악인 건 언니가 도무지 지치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속았으면 무기력해질 법도 한데 언니는 끝도 없이 사람을 믿었다. 새로운 일을 벌이고 어김없이 돈을 뜯기고 가차없이 버림받았다. 태초에 설계가 잘못된 것처럼 더 나쁜 쪽을 향해서만 굴러갔다.
---「밤은 내가 가질게」중에서

너는 그게 선의라고 생각하지? 돌아보고 미적거리고 자꾸 여지를 남기는 거. 나무반이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침 도착한 택시 안에 나무반을 밀어넣었다. 이 세상은 공평해. 네가 선을 가지면 저쪽이 악을 가져. 네가 만만하고 짓밟기 좋은 선인이 되면 저쪽은 자기가 제멋대로 굴어도 되는 줄 안다고.
---「밤은 내가 가질게」중에서

그런 게 아니라 선생님처럼 생각하게 되는 데 몇 년이나 걸릴까 싶어서요. 당장 두 학기만 지나도 나처럼 될걸. 내 시작은 시금치였어. 시금치요? 5세 반 점심 반찬으로 시금치가 나왔었거든. 다음날 애 아빠가 들이닥쳐서는 자기 딸한테 시금치를 먹였다고 멱살을 잡더라고. 그걸 먹고 애가 체해서 응급실에 다녀왔다나. 무릎 꿇고 빌라고 난동을 피우다가 난데없이 시금치 한 통을 꺼내는 거야. 시금치가 그렇게 몸에 좋으면 니가 다 먹으라고, 자기가 보는 앞에서 당장 다 먹으라고. 먹었어요? 먹었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궁금해. 애가 아팠다면서 그 이른 시간에 시금치 무쳐 올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다른 사람을 괴롭히겠다는 일념으로 어떻게 그렇게까지 부지런해질 수 있었을까.
---「밤은 내가 가질게」중에서

언니가 개 목에 걸려 있는 은색 펜던트에 손을 댔다. 밤톨이라는 이름이 적힌, 혹시라도 주인이 찾아올까봐 계속 걸어두고 있었다던 그것이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펜던트가 떨어져나갔다. 밤은 내가 가질게. 언니가 개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늙고 새까맣고 병든 개의 이름은 토리가 되었다.
---「밤은 내가 가질게」중에서

문득 이선이 보고 싶었다. 체온이 높지 않은 이선의 서늘한 팔에 뺨을 문지르고 싶었다. 이선의 등에 이마를 딱 붙이고 긴 잠을 자고 싶었다. 내가 지닌 굴곡과 이선이 지닌 굴곡을 어찌어찌 잘 맞춰보면 평면이 되는 순간도 오지 않을까. 선이니 악이니 그런 것 없이 그저 평온하게 나란히 있을 수 있는 순간이. 다만 상냥하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나는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핸드폰을 쥐고 이선의 번호를 만지작거렸다. 검은 개를 데려왔어. 글자를 입력하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배가 아주 빨개. 약용 샴푸가 필요해. 이선아, 네가 필요해. 현관문을 열자 고소하고 매운 냄새가 훅 끼쳤다. 돼지 등뼈를 넣고 뚝배기에 푹 끓인 김치찜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선의 냄새. 이선의 신발. 언니가 서둘러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나는 등뒤에서 소리 없이 닫힌 현관문을 돌아보았다. 아침에 나갈 때만 해도 도어클로저가 고장나 뭐라도 잘라먹을 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닫히던 문이었다. 문 닫히는 속도를 가늠하며 몇 번이고 나사를 조였다 풀었을 이선이 떠올랐다. 더 조용하고 더 조심스러운 속도와 각도를 찾아서 몇 번이고 문을 여닫았을 이선.
---「밤은 내가 가질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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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볕이 드는 곳과 들지 않는 곳,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 그 모든 장소에서 만들어진 안타까운 마음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엇을 숨기는가. 어째서, 그들은 진심을 감추지 못하는가. 안보윤은 한국사회의 안전망이 얼마나 어설픈 그물인지 노련하고 섬세하게 이야기한다. 낱낱이 드러내고 힘껏 붙든다. 놓치지 않는다. 이 책을 다 읽은 후 나는 깨달았다. 이런 이야기를 아주 오래도록 기다려왔다는 것을.
- 강화길 (소설가)
안보윤의 그 작고 따스한 목소리는 결코 작지 않은 위대함으로, 결코 소박하지 않은 고결함으로, 어딘가를 향하여 필사적으로 팔을 뻗는 우리의 외로움을 따스하게 감싸준다. 작가는 트라우마의 ‘현장’만을 감식하는 조사관이 아니라, 트라우마 ‘이후’의 모든 과정을 끝까지 돌보고 보살피는 사람이므로.
- 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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