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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1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414g | 145*210*30mm
ISBN13 9788954696494
ISBN10 895469649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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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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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판타지나 미스터리 등 다양한 소설 기법을 동원해 우리 역사 속 인물이나 사건을 극화해왔으며 이를 통해 독자들이 무미건조한 사실의 축적만으로는 느끼기 어려운 정서적 충격과 공감을 맛볼 수 있기를 희망해왔다. 사실과 환상을 교묘하게 얽어 설계된 팩션 세계를 체험하면서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고 자기만의 역사적 진실을 찾아 지적 여행을 떠날 수 있기를 소망해왔다.
---「머리말」중에서

누군가를 나만큼 미워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나만큼 누군가를 미워하며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 증오에 치를 떨다가도 말할 수 없는 흠모의 기분에 빠져 차 마시는 기쁨조차 잊을 수 있을까? 일흔두 살이 된 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덧없는 업보의 바다에서 만났던 적장 이순신을 회고할 때마다 늘 그런 상태가 되고야 만다. 도요토미 관백 전하의 명을 받아 조선으로 출정하던 임진년, 나는 혈기 하나로 뭉쳐진 삼십대 핏덩이였다. 핏덩이는 조선인의 피를 묻혀가며 덩치를 키워갔고 이내 결코 이길 수 없는 적을 만나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교토의 한적한 마을에 은둔하며 불교에 귀의한 이 몸이 죽음을 앞두고 새삼 이 얘기를 꺼내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세상엔 아무리 발버둥쳐도 넘어설 수 없는 적이 있다는 걸 와키자카 가문의 후손들이 깨달아 차라리 현명한 절망을 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왜장 와키자카의 고백」중에서

사복은 잠시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한 후 입을 열었다. “저도 그게 너무 알고 싶었어예. 스님 같은 고승들께선 혹시 아실까 싶어 출가했다 아입니꺼. 근데 아무도 모르데예? 스님이 아까 성불이라 칸 게 내 보기엔 우습습니더. 내는 진즉 열 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아입니꺼.”
---「그날 밤 성불의 재구성」중에서

드 플랑시 공사는 말이 없었다. 테이블 위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김이 사그라질 무렵에서야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쿠랑 통역관, 이건 우리 프랑스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의 문제일세. 조선인 몇 명이 죽었다고 해서 감정적이 될 필요는 없어.” 쿠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이상 공사와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일개 통역관 주제에 정부의 비밀외교에 접근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모리스 쿠랑 이야기 2:왕비의 위험한 사생활」중에서

아버지께서 의자에 털썩 앉으셔서는 내 손을 쥐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나이 많은 신하들은 이 일을 죄 반대하는구나. 특히 최만리와 정창손은 집현전을 책임지는 부제학이면서도 한사코 내게 대들었다. 이제 믿을 건 동궁과 너뿐이다. 도와줄 테냐?”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그때부터 겁없이 그 일에 뛰어들었단다. 최만리가 상소까지 올려가며 언문 창제를 반대하자 아버지는 나를 핑계로 삼으셨어. 어차피 새 글자는 공주 같은 여자들이나 까막눈인 아랫것들을 위한 것이니 선비들에게 해될 게 전혀 없다고. 언문을 암글이라 부른 게 아마 그때부터일 거야. 아버지는 대신들 반대에 굴하지 않으셨고 네가 태어나기 두 해 전 마침내 신자 창제를 마치셨어.
---「세종,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중에서

입으로 하지 않은 말은 잠꼬대와 같아서 한을 남길 뿐이고 글로 쓰지 않은 말은 봄기운에 녹아버릴 고드름처럼 허무한 것이란다. 아버지께서 만드신 글자로 어미의 마지막 마음을 이렇게 너에게 건넨다.
---「세종,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중에서

홑몸으로 궁 밖에 나온 건 처음이었다. 평강은 쉼없이 눈물 흘리며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비단이나 모직물로 된 화려한 의상들에 익숙했던 그녀 눈에 칡으로 만든 갈옷을 걸친 평민의 세계는 무채색이었다. 색이 사라진 세상 안에서 오직 자신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두렵게 했다. 그렇게 공포와 호기심으로 뒤범벅된 혼돈 속에서 그녀의 발걸음은 마침내 온달 집 앞에서 멈췄다.
---「공주는 왜 바보를 사랑했을까?」중에서

오늘밤 나는 아버지 침전 옆에 있는 자명고를 찢고 돌아와 그대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다. 왕자는 정녕 기쁜가? 나는 북을 망가뜨린 내 손이 한없이 미우며 이 대역죄를 스스로 용서할 길이 없다. 죽음으로 참회하고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자처럼 세상에서 사라지리라.
---「왕자 호동에게 고함」중에서

작은 인연으로 끝날 것 같았던 하나오기와의 만남은 귀국 이후 기이한 중량감으로 최북의 내면을 파고들더니 급기야 닿을 길 없는 영원의 사랑으로 윤색되어갔다. 최북은 오사카에서의 마지막 밤에 하나오기가 했던 말을 중얼대며 자신을 스쳐지나간 운명을 애도했다. “인생의 꽃잎이 지고 있어요. 같은 꽃은 두 번 피어나지 않아요.”
---「사랑이라면 도톤보리 운하에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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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앞바다. 일본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응시하고 있는 한 인물. 그는 바로 조선의 바다를 지키고 있는 이순신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와키자카의 참담한 독백… 흥미진진하다. 이것은 역사인가, 소설인가. 역사라기엔 허구의 인물들이 조용히 종횡무진하고 있고, 소설이라기엔 역사적 사실이 강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 역사의 건조함과 소설의 허무함을 내려놓고, 역사의 생생함과 소설의 흥미진진함을 극대화하였다. 팩션의 신기원을 열어젖힐 작품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 최태성 (한국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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