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가 한때 썼던 것과 비슷한 매트리스 침대에 가냘픈 몸이 뉘어 있었다. 긴 머리칼은 땀과 피에 젖어 들러붙어 있고 팔다리는 쭉 뻗은 채였다. 그것은 조금 의외의 자세였다. 학대 및 강간이라던 프랑크의 설명을 듣고 그녀는 제니퍼 메이슨이 태아처럼 양팔로 하체를 감싸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취하게 되는 전형적인 자세이다. 하지만 이 젊은 여성은 피에 젖은 시트 위에 괴이하리만치 편안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죽음의 순간을 구원으로 받아들이기라도 한 듯. ---p.15
“젠장, 빌어먹을!” 격분한 율리아가 소리치며 튕기듯 일어섰다.
“도대체 그 빌어먹을 짓을 끝도 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이유가 뭐죠? 맙소사, 저도 수사에 참여하고 싶고,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저지하고 싶다고요!” 그녀는 절망에 휩싸여 쿵쿵거리며 사무실을 가로질러 가서는 메마른 시멘트벽 앞에 멈춰 섰다. 생각 같아서는 벽을 힘껏 내리치고 싶었지만, 그저 두 손을 벽에 짚은 채 상체를 숙이고 고개를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p.71
페터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고급 빌라에서의 심문, 완벽한 알리바이,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그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당시에는 그 젊은 대학생을 애초부터 용의선상에서 제외시켰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는 걸음을 돌려 문쪽으로 돌진했다. 등 뒤에서 카울바흐의 당황한 외침이 들려왔다. “잠깐만요! 여기 정확한 주소가…….”
그러나 페터는 이미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p.224
“비키세요, 경찰입니다!” 그는 몇 번이나 외친 끝에 마침내 무리한가운데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바닥에는 터키색 폴로셔츠를 입은 금발 여성이 쓰러져 있었다. 두 눈은 감겨 있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된 채였다.
---p.397
율리아는 비닐을 뜯고 그 안에 든 봉투를 열었다.
‘꽃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유감이고요.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은 꼭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며, 죄를 속죄되지 않은 채 남겨둘 수는 없습니다.’
“여기요, 이 꽃 반장님 드릴 게요. 저는 아무 데도 필요가 없네요. 사무실에 이런 걸 두기도 싫고요.”
“나한테 백합 열두 송이를 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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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화를 끊은 뒤 여전히 심문 중인 페터와 작별인사를 하고 나딘 노이하우스에게로 향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남편의 사망소식을 알릴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게 기뻐할 일인지, 이 일로 그에게 다시 희망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그녀와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시체 옆의 쪽지와 이마의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범인이 그런 잔인한 의식을 벌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자문했다.
--- p.134
그중 한 장을 봉투에 넣은 뒤 그 위에 율리아 뒤랑의 이름을 적었다. 책상 위의 것들을 다시 서랍 속에 집어넣은 그는 거실로 갔고,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아내는 그를 보고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아내의 입술을, 목소리를, 그리고 오래전부터 더는 들을 수 없었던 웃음소리를 사랑했다. 그는 아내를 사랑했고, 아무도 그만큼 그녀를 사랑할 수는 없을 터였다. (중략) 하지만 이제 결코 그 사랑에 대한 응답을 받을 수 없으리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코냑을 다 마신 그는 또 한 잔을 따라놓고 술기운이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 p.228
“방문을 걸어 잠그지 말라고 벌써 수천 번도 더 말했을 텐데?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있으면, 크게 혼날 줄 알아. 내 말 알아들었어?”
그녀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왜 아직 옷을 벗지 않았어? 잠자려고 한 줄 알았는데.”
“지금 막 벗으려던 참이었어요.” 그녀는 시선을 내리뜬 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얘야, 어서 벗어라.” 그는 갑자기 다정하게 말하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네가 정말로 잠자리에 드는지 곁에서 지켜볼 생각이야. 자, 어서 옷을 벗으렴.” 그는 침대에 걸터앉았다.---p.10
“그런데,” 율리아가 운을 떼고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다들 주장하는 대로 로젠츠바이크가 정말 슈퍼맨이었다면, 왜 누군가가 인슐린에 독을 탔을까요?”
“뒤랑 형사의 직감이 오늘은 뭐라고 말합니까?” 프랑크가 씩 웃으며 물었다.
율리아도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내 직감도 말하길, 칭송도 거짓말이고 슈퍼맨도 거짓말이래요. 로젠츠바이크에게는 그 누군가가 꼭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 까만 얼룩, 그것도 어쩌면 아주 크고 새까만 얼룩이 있었을 거라는데요.”---p.75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내가 왜 이러지? 숨 막힐 것처럼 이상해. 무슨 일이지?”
그녀는 책상에 앉은 채로 몸을 돌렸다.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여서 그를 향해 내뿜었다. 눈빛이 차갑고 냉혹했다. (중략)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고, 그는 끔찍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공포가 덮쳤다. 몸의 기능이 거의 완전히 마비되었다. 15분 후, 그는 의식을 잃었다. ---p.181
마침내 율리아는 벌떡 일어났으며 수화기 너머에서 말하고 소리치고 애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전화기에 대고 외쳤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지만 전화선 다른 편 끝에서는 그냥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율리아는 단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이 바싹 타들어 갔다. 맙소사, 그녀는 생각했다. 이게 사실일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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