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일을 40여 일 앞둔 2002년 11월 7일, 노무현 후보는 대전의 충남대 정심화국제문화회관에서 학생회의 초청으로 강연을 했다. 대전에서 선거운동을 하던 나도 당연히 참석했다. 동북아의 외교안보전략, 지방분권 및 균형발전, 행정수도 이전 등이 강연의 주제였는데, 말미에 갑자기 검찰 문제가 거론됐다. “가장 먼저 개혁해야 할 대상은 검찰입니다. 국민의 정부가 실패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목소리는 우렁찼고 어조는 단호했다. 더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정권과 검찰이 유착하는 바람에 정권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분명히 읽혔다. 나는 1분도 채 안 되는 이 대목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후보님은 당선되면 정말로 검찰부터 개혁하겠구나.’라는 느낌이 확 왔다. 당선자가 검찰개혁의 방향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뜻이 읽혔다. 방향이 잡힌 이상 검찰개혁안의 구체적 틀을 짜고 내용을 채우는 데 몰두했다.
내가 1차로 만든 검찰개혁의 로드맵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고비처) 설치, 둘째는 특별검사(특검)의 상설화였다. 두 개혁안은 이미 노무현 후보 시절에 발표된 바 있었다. 나는 이를 구체화하는 실무 작업에 돌입했다.
--- p.38~39, 「노무현과 만나다」 중에서
광주에서 5·18 기념식을 마치고 상경하는 KTX 기차에 올랐는데 마침 문 전 대표와 같은 칸에 탔다. 잠시 후 김경수 공보특보가 왔다. “형님, 대표님이 잠깐 말씀 좀 나누자고 하시네요.” 바로 그분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략) “내년 대선은 캠프를 움직이는 핵심 그룹도 새로운 사람들로 진용을 짜려고 한다. 박 의원이 적극적으로 도와달라.”라고 부탁했다. 당연히 흔쾌히 승낙했다. 문 후보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탄핵으로 예정보다 일찍 치러진 다음 해 대선에서는 정말 열심히 뛰었다. 대통령 당선에 작으나마 도움이 됐다고 자부한다.
문 대통령은 2020년 말 나를 68대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했다. 문 대통령은 국회에 제출한 장관 청문 요청안에서 나에 대해 “20대 국회에서 민주당 최초로 공수처법을 대표로 발의하는 등 굳은 소신을 바탕으로 검찰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판사와 국회의원으로 쌓아온 법률적 전문성과 경륜, 굳은 소신과 개혁성을 바탕으로 국민을 위한 법무·검찰개혁을 완수하고, 법치주의를 확립할 법무부 장관의 역할을 수행할 적임자”라고 평했다. 이로써 나는 내각의 일원으로서 20년 만에 다시 문재인 대통령을 보필하는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 p.65~66, 「사건 기록 보따리를 가져온 변호사, 대통령이 되다」 중에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셨을 어린 시절, 자신과 같은 운명의 남자와 결혼, 자식 다섯 남겨놓고 훌쩍 떠나버린 남편, 사실상 평생을 홀로 자식을 키워 오다 마감하신 어머니의 삶은 그 자체로 한(恨)이었다. 다만, 어머니는 살아생전 단 한마디도 당신의 삶을 한탄하시지 않으셨다. 아들이 늦게나마 대학을 진학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사가 되고, 대통령의 법무비서관이 됐음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자식의 처지에서, 그리고 어머니를 책임져야 했던 장남의 처지에서 어머니를 그렇게 보내니 그동안 쌓였을 어머니의 한이 온전히 내게 전해지는 듯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국회의원선거 경선에 임해 실패했던 것도 내 책임이었다고 생각하니 터질 듯이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 앞에서 마지막으로 굳게 다짐했다. 어머니를 절대 욕되게 하지 않고, 어머니의 희망대로 당신의 아들이 나라를 위해서 정말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어머니의 손발이 되어드리겠다고 했는데 그걸 다하지 못한 것에 용서를 빌고, 앞으로 어머니와 같이 힘없고 서러운 사람들의 손발이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p.98~99, 「아, 어머니!」 중에서
이후 안기부가 법원에도 좌경용공판사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의 비디오를 제작해 예비군에 배포, 교육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삼권분립의 한 축인 행정부 내 국가 최고정보기관인 안기부에서 다른 한 축인 사법부의 판사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공격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대법원장이 여름휴가 도중 뒤늦게 비디오 소식을 접하고는 깜짝 놀라 복귀했다. 대법원장은 안기부에 항의했고, 비디오는 전량 수거됐다. 수거된 비디오 속에서 검정 법복을 입은 괴물처럼 표현된 나를 발견했을 때의 괴로웠던 감정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사가 안기부 과장이란 사람에게 협박받고, 정보기관으로부터 좌경용공으로 매도되고, 경찰관의 뒷조사를 받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인지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판사의 인권과 안전도 보장되지 못하는 사회라면 과연 일반 대중의 삶은 얼마나 고달플까? 이 사건을 통해서 소위 최초의 문민정부라 하는 김영삼 정권의 한계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수준을 절감할 수 있었다. 아직 이 땅에 민주주의는 멀었고 권력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p.114, 「협박받는 대한민국 판사」 중에서
굉장히 힘든 결정이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나와 위원들 모두 가슴 졸이며 직접 고발장을 작성해 원세훈 원장을 국정원법 위반(정치 참여 금지 위반), 직권남용, 공직선거법 위반(사전 선거운동 금지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2013년 4월 1일, 나는 고발장을 봉투에 넣어 서울중앙지검 민원실로 향했다.
어느새 소식을 듣고 몰려온 기자들이 현장에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고발장을 들고 포토라인에 서자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졌다. 가슴은 두근댔지만 정신은 오히려 냉정을 찾아가며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냐, 어디 한번 가 보자. 사건의 시시비비를 낱낱이 가려 보자.’
서울중앙지검에 특별수사팀이 꾸려졌다. 나와 사법연수원 동기인 윤석열 검사가 특별수사팀장을 맡았다. 당시 검찰총장은 채동욱이었다. 채 총장은 ‘특수통’ 출신의 강골 검사로서 충실하게 직무를 수행해 와 검찰 내부에서도 신망이 높았다. 사실 특별수사팀이 신속하게 꾸려진 것 또한 채 총장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건이 박근혜 정권 임기 초반에 발생했고, 정권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대선 관련 불법 의혹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검찰총장이라고 해도 갓 취임한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을 좌우하는 수사를 신속하고 엄정하게 진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청와대 및 여당도 이런 검찰 수사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 p.144~145, 「18대 대선의 미스터리-국정원과 전쟁의 서막」 중에서
장관이 되면 검찰 위주의 편향된 법무행정을 혁신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핵심은 ‘민생에 힘이 되는 법무행정’이다. 기실 법무부는 실제 국민 생활과 경제 활동에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도 국민에게는 그저 검찰 집단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런 편향된 인식에서 벗어나 실제 법무부가 국민과 가깝고 친숙한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간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교정본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인권국 등의 기능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현장행정은 그런 철학의 발로였다. 바로 현장에서 문제를 식별하고, 즉각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했다. 실제 1년 4개월의 임기 동안 165회에 걸쳐 현장을 찾았다. 3일에 한 번 꼴이었다. 전국 각지를 돌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강행군이었다. (중략) 나는 그들을 직접 찾아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수용자들의 상황을 점검했고, 교도관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야 했다.
나는 작고하신 외삼촌의 일화를 소개하며 교도관들의 감정에 동조했고, 진심으로 그들의 노력을 치하했다. “작고하신 외삼촌이 평생 안양교도소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하셨다.”라고 털어놓으며 “바깥에 나가서 교도소에서 근무하신다는 말을 못한다는 이야기에 정말 가슴 아팠다.”라고 말했다.
--- p.233~234, 「장관 첫 일정은 동부구치소 방문」 중에서
지난 대통령 선거 직전 더불어민주당이 어렵게 통과시킨 수사기소분리 법안에 대해 국민의힘 일부 의원과 한동훈 장관과 검사들은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검사의 수사권은 헌법상의 권한이고 검사의 직접수사권을 부패범죄와 중요 경제범죄에 한정한 검찰청법 및 형사소송법은 법률로써 검사의 헌법상의 권한을 제한한 것이므로 위헌이라는 취지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검사의 권한은 헌법상의 권한이 아니므로 법률로써 얼마든지 수사권을 배분할 수 있다고 하며 검사의 직접수사권 축소를 주요 골자로 하는 수사기소분리 법안도 위헌이 아니라는 결정을 낸 바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부는 한동훈 장관을 통해 시행령을 개정하는 방법으로 수사권 축소와 제한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검찰청법과 형사소송법의 취지에 위반해서 검사의 직접수사권 확대, 경찰에 대한 사실상의 수사지휘권 부활, 경찰수사종결권의 사실상 폐지와 같은 위헌·위법한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당연한 이치로 이는 사후에 법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
--- p.264, 「윤석열 정부, 검찰개혁의 성과를 뒤집다」 중에서
정치를 시작하고 수모도 겪었지만, 3선 의원 당선, 법무부 장관 입각 등은 그래도 성공적인 정치 여정이라 자부했다. 여기 길 끝에서 멈춰도 누군가는 손가락질하고 누군가는 박수를 쳐 줄 것이다. 어떤 정치적 영화에 대한 갈망도 없었다. 길 끝은 그런 곳이었다. 멈춰서더라도 누구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길 끝에 있는 사람들은 무던히 새 길을 찾고 또 길을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간 나는 그저 앞선 시대가 만들어 놓은 아주 편안한 평탄대로를 힘들다며 헉헉대며 땀 흘려 걸어온 것은 아닐까. 길 끝에서의 고민은 생각에 생각을 물고 계속됐다. 길 끝에서 만난 남해 바다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출렁였다.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이 있다. 추운 겨울은 또 따뜻한 봄날을 품고 있다. 찬 추위를 스스로 불러 고매한 향기를 뿜어내는 매화처럼 살아야 한다. 한파는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붓을 들어 얇디얇은 화선지에 번짐 없이 한숨에 써 내려가야 한다.
“길 끝에서 다시 시작한다.”
--- p. 273~274,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