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모는 나쁜 짓을 했으므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숙제를 안 해 오거나 규칙을 어겼을 때 벌을 받듯이, 잘못에는 그것만큼의 대가가 있어야 하는 법. 주홍모가 우리 반 여자애들 외모 순위 투표를 남자애들 단체 톡방에서 한 건 명백한 잘못이다. 아무리 재미 삼아 했다고 우겨도 그로 인해 여자애들이 받을 피해는 엄청나다.
--- p.9
홍모의 뒤통수에 대고 조용히 키득거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예전 같았으면 나 역시 ‘쌤통!’ 하며 이 사건을 관찰자의 입장으로 편하게 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걸쇠를 푼 사람은 바로 나니까. 내가 도둑질을 한 건 아니지만, 누군가의 도둑질을 도운 셈이 된 거다. 본의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니, 조금 더 확대 해석을 해 보면 어쩌면 내가 걸쇠를 풀어 놨기 때문에 누군가가 도둑질을 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 p.28쪽
“네 눈엔 내가 이렇게 보이나 보네?”
“어. 너 이렇게 생겼어.”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꼭 집어 말한다. 그래, 좋다 이거야! 자기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고 치자. 근데 얜 빈말이란 것도 모르나? 팩트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 친구 마음 읽어 줄 줄도 모르면서. 완전 유연성 제로다.
항상 이런 식으로 내 감정을 마구잡이로 건드려 놓는 바람에 요새 난 하윤이 하는 말에 다 삐딱선을 타게 된다.
--- p.43
자신은 뭐든지 다 안다는 말투. 네가 뭘 아냐, 내 말대로 해라,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네 머릿속을 나는 다 꿰뚫고 있다, 내가 모를 줄 아냐? 뻔할 뻔 자다, 나는 너 같은 생각 안 해 본 줄 아냐?
하윤의 모습에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왜 요새 하윤에게 미친 듯이 화가 났는지를. 정확하게 짚자면 내 잠재의식의 어느 부분이 건드려진 건지를 알 것 같다. 누군가가 계속 나의 아킬레스건을 잡고 튕기는 기분이 들어서였던 것이다.
--- p.55
난 어릴 때부터 엄마한테 이렇게 교육을 받았다.
“드라마 촬영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 연줄이 되니까, 거기 스태프분들한테 인사 잘해야 해.”
그래서 항상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그때부터 인사를 잘한다고 칭찬받아서 그런지 지금도 인사에는 유난히 더 특화된 듯하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엄마는 늘 이렇게 지적했다.
“사람들이 너 알아보잖아. 바른 자세!”
그래서인지 난 남을 많이 의식하면서 살아왔다.
--- p.72
인증하지 않으면 내 존재 자체가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어느 게 진짜 나인지 괴리감이 생기기도 한다. 그럴 땐 무조건 좋은 쪽으로 생각한다. 살아 있는 한 바퀴를 계속 굴려야 하니까 멈출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지난번에 브이로그를 찍다가 본의 아니게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학교 운동장 개수대 위에 폰을 올려놓고 촬영 버튼을 눌러 놨는데, 집에 와서 편집하려고 영상을 켜 보니 애들 둘이 싸우는 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처음엔 남자애들의 흔한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지우려고 했다. 그런데 듣다 보니 우리 반 홍모와 인섭의 목소리라는 걸 알게 됐다.
--- p.84
홍모는 장난은 좀 심하지만 거친 애가 아니고, 오히려 과잉보호를 받으며 커서 유약한 편이니까. 내가 완급만 잘 조절하면 아주 좋은 파트너로 지낼 수 있는 애다.
남들이 보기엔 꼬붕 노릇을 하는 내가 속없는 놈으로 보이겠지만, 상관없다. 남들이 날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난 남에게 솔직하게 내 속을 열어 보이고 싶지도 않고, 그 누구와도 특별히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게 외롭거나 괴롭지도 않다. 그건 아쉬운 게 있는 애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난 아쉬운 게 없다. 바라는 게 없으니까.
--- p.99
애들은 종종 자기 운동화나 안 쓰는 게임기 같은 걸 중고나라에 팔아먹었다. 집안 물건을 팔아먹는 건 나쁜 짓이지만 자기가 안 쓰는 물건을 내다 파는 건 재활용이고, 아나바다 운동의 일종이고, 나아가 환경 보존에도 일조하는 바람직한 일이라고 합리화까지 했다. 그래서 나도 별 죄의식 없이 캐주얼하게 한물간 아이템인 자전거를 팔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홍모에게 총알이 생기면 꾼 돈을 당장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게 내 발상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다음부터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 p.112
뭐든 익숙해진다는 건 무서운 일인 거 같다. 박정만의 “또 보자”가 불길하게 와닿았던 이유가 바로 이거다. 하지만 난 정말 정말 이번까지만 할 생각이다. 이번에 들어온 총알로 세뱃돈 다 날린 거 반만이라도 회수하면 다시는 안 할 거다. 그러니 박정만을 다시 볼 생각은 절대 없다.
--- p.135
그렇게 계속 되씹다 보니 그게 뭔지 알 것만 같았다. 먹어도 배고픈 것 같고, 씻어도 찝찝한 것 같고, 지갑에 용돈이 가득 들어 있어도 부족한 거 같고, 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외로운 거 같고. 아, 그래,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은 느낌이랄까? 중독의 다른 이름은 결핍이라던 말까지 더불어 이해가 가면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내가 왜 헛헛한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p.144~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