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우리는 이미 대리전·게릴라전·테러 공격·글로벌 전쟁 등 온갖 형태의 특수한 대규모 무력 사태를 경험했다. 그럼에도 이번에 진짜 전쟁이 ‘귀환’했다고 강력히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지난 70여 년간 이어진 일련의 유혈 분쟁의 구도 안에서 현 사태를 규명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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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 유발 전쟁은 오로지 그 자체를 위해 수행될 뿐, 평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폭력을 통해 추구하는 것도 그저 즉각적인 협박, 공포, 혼란의 효과뿐이다. 금세 완전무결한 무기의 법칙이 사회를 지배했다. 시민사회(매일같이 어떻게 하면 보금자리를 지키고 자식을 부양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만 골몰한 평범한 시민들)는 파괴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볼모가 되어, 오로지 생존만을 강요받았다. 이런 혼돈의 논리를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예가 있다면, 바로 2011년 반정부 시위가 극에 달했을 때 바샤르 알아사드가 감옥에 갇혔던 지하디스트 포로 수백 명을 풀어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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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양면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해법은 앞서 기술한 것처럼 전쟁 당사자들에게 각기 상반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가령 푸틴을 국민의 운명에 무관심한 사이코패스 독재자이자 냉혹한 인간으로, 젤렌스키를 결기에 찬 모범적인 영웅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보드카에 찌들고 증오와 우둔함으로 가득 찬, 짐승 같은 병사들로 구성된 러시아 군대를, 눈부실 정도로 용맹스럽고 뜨거운 애국심에 고취된 우크라이나 민병대와 서로 대비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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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특히 전쟁에 임하는 군인의 정신적 자질이 ‘도덕적’일 수는 있어도, 전쟁이 ‘정의롭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을까? 항상 전쟁을 선포하고, 결정하고, 개시하는 것은 나쁜 이유들 때문인데 말이다. 폭력에 기대는 방법도 그 자체로 불법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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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정당한 명분’의 전쟁은 정의와 불의를 서로 구분짓기 때문에, 나와 적의 동등성을 철저히 파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기도 했다. “독립국 간에는 결코 징벌적 전쟁bellum punitivum이 성립할 수 없다. 사실상 징벌이란 상급자imperantis와 하급자subditum의 관계에서나 가능한 일인데, 국가 간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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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외부의 전쟁은 내부의 복종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전쟁은 국가 간에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사람들의 눈앞에 똑똑히 보여줌으로써, 개인들 간의 원시적 내전이라는 환상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더욱 극대화한다. “그대들이 만일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대들 사이에도 똑같이 참혹한 일이 벌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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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전쟁의 목적이 도덕적일수록 도덕적이지 않은 전쟁이 정당화된다.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가장 규범과는 거리가 먼, 가장 참혹한 전쟁은 최종적이면서도 영구적인 평화를 목표로 하는 전쟁이다. 평화가 두 무력분쟁 중간에 존재하는 휴지기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일종의 사법적 상태에 해당한다면, 전쟁은 ‘합리적인’ 중간상태를 형성하며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이미 평화를 준비하는 과정을 동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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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전쟁은 서로 상대의 악의를 예단한 데서 비롯된다. 상상이 만들어낸 양측의 공포는 결국 현실을 만들어낸다. 서로의 적개심을 의심하는 순간, 결국 적개심이 죽음의 길 끝으로 내달린다. 위험과 공포가 서로의 편집증을 살찌운다. 에라스무스는 상상이 빚어낸 공포라는 유령이 전쟁을 잉태하는 현상을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구절로 표현했다. “전쟁은 가장된 전쟁으로부터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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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기대해야 할 평화란, 다시 말해 합리적인 철학이 토대로 삼아야 할 평화란, 무장 평화나 공동묘지의 평화보다는 훨씬 더 희망에 찬, 조금 더 진실 어린 평화여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역사의 종말을 의미하는 지복천년의 평화, 불순분자들을 정화할 참혹한 ‘최후의’ 대전쟁을 통해 실현될 그런 평화도 결코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화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보다 신비주의적인 성격이 적은 두 가지 종류의 평화를 제안해볼 수 있다. 그러려면 먼저 전쟁이 언제나 칸트가 말한 의미에서 반공화주의적이고, 스피노자가 말한 의미에서 반민주주의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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