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장을 찬 할리우드 주류와 달리 트럼보와 함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영화인 대부분은 그대로 사라졌다. 일감이 끊겼고, 재능을 잃었고, 이름은 지워졌다. 블랙리스트가 찢겨진 후에도 돌아오지 못했다. 트럼보는 안간힘으로 버텼고, 겨우 광기의 시대에서 생존했을 뿐이다. 트럼보의 상처 가득한 승리는 펜은 칼보다 아주 가끔만 강할 뿐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 p.33~34,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가, 돌턴 트럼보」중에서
번스타인은 연주자들의 친구였다. 그는 연습하기 전에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단원들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그는 연주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었다. “부모님은 잘 지내나요?” “아이는 잘 크고 있나요?” 대화를 주도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듣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테크닉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했다. 번스타인은 연주자를 자신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부하로 여기지 않고, 파트너로 대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음악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연주자들이 제각각 답을 내릴 수 있도록 북돋웠다. 훌륭한 커뮤니케이션 결과는 고스란히 근사한 공연으로 이어졌다.
--- p.40, 「리더의 품격, 레너드 번스타인」중에서
그가 주목한 건 조선인들의 얼굴이었다. 서양화 기술을 익힌 이쾌대 그림은 당시 조선 화가들의 인물화와는 달랐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의 작품처럼 이쾌대가 그린 인물들은 선이 굵고, 선명하고, 정확하고, 비장했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 〈운명〉(1938)으로 일본 유명 공모전에서 입선하며 이름을 알렸다. 〈운명〉은 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숨을 거두자 그를 둘러싼 네 명의 여인이 비탄에 잠긴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서양화 단골 주제인 예수의 죽음을 다룬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구도다. 이쾌대는 예상 못 했을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 이 그림 속 기운과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리라고는.
--- p.66, 「살아남은 그림, 이쾌대」중에서
작곡가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는 4분 33초 동안 이곳에서 발생한 바람 소리, 빗소리, 관중의 수군거림을 음악으로 여겼다. 물론 작곡가도 공연 중 어떤 소리가 탄생할지는 몰랐다. 우연에 맡겼다. 불확실성이 빚어내는 소리가 공연의 핵심이었다. 연주 없는 연주 〈4분 33초〉가 일으킨 파장은 컸다. 마르셀 뒤샹이 전시장에 변기를 가져다 놓고 “이것도 예술”이라고 주장하며 현대미술 개념을 바꾼 사건과 비교될 정도다. 현대음악의 틀을 뒤집어버린 존 케이지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 p.106, 「이것도 음악이다, 존 케이지」중에서
영혼과 육신 모두 너덜너덜해졌지만, 인기는 치솟았다. 2008년 미국 그래미 어워드에서 에이미는 5관왕에 올랐다. 당시 에이미는 약물 중독 문제로 미국 비자가 나오지 않아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보수적인 그래미 어워드가 시상식에도 못 온 외국 가수에게 이 많은 상을 안긴 건 미국 음악사에 남을 사건이었다.
--- p.153, 「누가 스타를 죽였는가, 에이미 와인하우스」중에서
비참한 삶을 견디다가 떠난 예술가의 이야기는 흔하다. 피아프 역시 그런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삶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 이 드라마의 장르는 비극이다. 하지만 피아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1960년. 몸과 마음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이때 피아프가 부른 곡이 〈아니요,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다. 마지막 남은 영혼 한 방울까지 다 끌어모아 노래를 불렀다. 눈물이 가득한 삶이었지만, 자신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 p.196, 「후회하지 않아, 에디트 피아프」중에서
한 인간에게 주어진 에너지에는 총량이 있다. 겐타로는 에너지 대부분을 『베르세르크』에 쏟았다. 그래서 그의 만화는 완벽에 가깝다. 하지만 만화 바깥의 삶을 돌보지 못했다. 칙칙한 작업실 안에 있느라 수십 번이나 봄을 놓쳐버렸다. 가츠가 끝나지 않을 싸움임을 알면서도 계속 검을 휘둘렀듯이, 작가도 묵묵히 그리고 또 그렸다. 어떤 완벽주의자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붙잡고자 자기 자신을 통째로 내던진다.
--- p.231, 「전력투구로 싸웠던 남자, 미우라 겐타로」중에서
모리코네를 모르는 사람도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에 흐르는 음악을 들어보지 않았을 확률은 희박하다. 모리코네는 황야의 무미건조한 바람을 닮은 휘파람 소리로 영화를 가득 채웠다. 이 사운드는 서부영화의 상징이 됐다. 영화의 성공으로 레오네는 할리우드에서 러브콜을 받아 미국으로 갔다. 이스트우드는 정통 서부극 스타 존 웨인을 대체하며 거물 배우가 됐다. 모리코네는 로마를 떠날 필요가 없었다. 전 세계 영화감독이 모리코네와 일하러 이탈리아를 찾았다.
--- p.293, 「시네마 천국으로 떠난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