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많은 이들에게 가장 익숙한 예수의 얼굴일 거다. 익숙하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전형적 예수 이미지가 처음부터 ‘서구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인 남자 아버지 하느님’의 ‘백인 남자 아들 예수’는 백인 그리스도인이 당연시하며 상상한 예수의 이미지였으니까. 그런데 실제 역사적 예수는 백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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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유대인은 대신 고통받고, 함께 고통받는 메시아보다 다윗 왕 같은 강력한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그를 환영하며 환호한 군중은 다윗 왕을 떠올렸고, 심지어 제자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처럼 십자가의 땅에서 이중적, 삼중적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갈릴래아의 유대인들은 한편으로는 반란을 열망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메시아를 기대했다. 그리고 한 아기가 태어났다. 예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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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은 실제 예수의 탄생일이 아니다. 예수의 생일은 아무도 모른다, 12월 25일은 원래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313년에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기 전 숭배했던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무적의 태양신)’의 탄생일이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에는 이교적 기원이 있지만,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재연되는 예수의 탄생 드라마는 예수가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를 기다렸던 이들이 누구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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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체험하고 증언한 친밀하고 자애로운 ‘아바’ 하느님을 후대의 그리스도교 교회는 다시 엄하고 권위적인 가부장적 ‘제왕’ 하느님으로 되돌려 버렸다. 결국 하느님과 인간의 거리는 다시 멀어져서, “오, 거룩하시고, 영원하시며, 전지전능하시며...” 등의 종교적 미사여구로 표현하는 하느님은 인간의 다정하고 따뜻한 아빠라기보다는 인간 위에 군림하는 절대 군주처럼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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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교회는 예수의 자발적 가난을 잊고 부유해졌고, 부를 누릴수록 교회는 부패했다. 교회의 부패가 극에 달할 때마다 다시 예수의 가난을 기억하며 복음서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는 영적 쇄신 운동이 일어났다. 수도원 운동이 그것이었다. 수도원 운동은 수도자들에게 공통적인 세 가지 서원을 요구한다. ‘가난, 정결, 순명’이다. 문제는 수도원주의 역시 맘몬의 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수도회가 가난해지려고 몸부림칠수록 가난의 복음적 이상의 가시화에 감동한 사람들이 수도원에 돈과 물질을 바쳤고, 그래서 가난한 수도회는 금세 부유한 수도회가 되었다.
--- p.128
그리스도인 중에는 ‘내세의 천국’을 하느님 나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는 살아서 예수 잘 믿고, 그 결과로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신앙과 삶의 목표다. 그들은 오늘도 거리에서 거친 목소리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친다. 하지만 정작 예수는 내세의 천국에 대해선 거의 말하지 않았다.
--- p.152
예수는 사회적 소수자, 약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를 통해 예수는 우리 곁, 우리 안의 소수자와 약자를 환대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환대하는 것임을 깨우쳐 준다. 그리고 구원의 길은 종교적 교리의 고백이나 의례의 실천이 아니라 소수자, 약자를 환대하고 돌보는 데 있다고 가르쳐 준다.--- p. 165쪽
예수는 ‘세상의 구원’을 바랐지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에게 구원의 장소는 세상 밖이 아니라 세상 속이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는 것, 즉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이 그의 소명이며 수행이었다.
--- p.197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보낸 마지막 일주일은 많은 이들에게,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혼란스럽고 충격적인 사건의 연속이었다. 그 사건들을 기록한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벌인 일들을 매우 치밀하게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 자신이 예루살렘 사건의 기획자였고, 그 사건에는 십자가 죽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 p.225~226
시대가 고통스럽고 혼란할수록 우리는 메시아를 열망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대하며 따라가려는 메시아가 ‘어떤 메시아’인가다.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쥔 카이사르나 다윗 같은 정치적 메시아, 신비주의나 열광주의로 대중을 현혹하는 종교적 메시아,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예수 같은 ‘고난받는 메시아’도 있는 것이다.
--- p.229
예수가 자신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확고히 알고 있었다면, 십자가 죽음 앞의 번민과 괴로움은 무슨 의미였다는 말인가? 십자가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부활은 더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폴 틸리히는 십자가는 ‘사건이면서 상징’인 반면 부활은 ‘상징이면서 사건’이라고 한다. 십자가에 대해서는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성에 무게를 두는 것이고, 부활에 대해서는 종교적 상징성에 무게를 두는 것이다.
--- p.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