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 얼굴을 향해 손을 날렸다. 짝! 소리와 함께 영지의 얼굴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가려졌다. 영지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날 쳐다보았다. 놀란 표정은 금방 웃는 미소로 바뀌었다. “내가 왜 알영지가 된 줄 알아? 너한테 조금이라도 덜 괴롭힘당하려면 알바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했거든. 그렇게 수많은 알바를 하다 보니 한번에 알겠더라. 첫날 양말 속에 든 카드를 보자마자, 이 일이 보통 일이 아니란 걸 말이야.” 목소리는 떨렸는데, 영지 입가엔 미소가 보였다. “이건 너한테 받은 만큼 돌려주라는 신의 알바였어.” “내가? 내가 뭘? 어릴 때 친구끼리 장난 좀 친 걸 가지고 그러냐?” “너한테는 장난이었지? 당하는 사람은 아니거든. 그래서 난 학교도…….” “그래서 전학 간 거야?” “전학? 억울한 게 그거야. 난 학교까지 그만둘 정도로 힘들었는데, 너는 기억도 못 해. 그냥 착한 딸, 착한 학생으로 살잖아.” 영지의 눈에 눈물이 글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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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결에 손가락 끝에 뭔가 닿는 것 같았다. 살짝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엄마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엄마가 고개를 떨굴 때마다 옆에서 잠든 이안이 보였다. 이안도 소파 위로 한쪽 팔을 뻗고 눈을 감고 있었다. 곰지락곰지락. 아주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뻗은 팔의 손가락 끝에 뭔가 닿았다. 이안의 손가락 하나가 내 손가락 끝에 닿았다 떨어졌다. 벌컹벌컹. 잠자던 심장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모든 신경이 내 손가락 끝으로 모아졌다. 티브이 소리도 사라지고, 시끄러운 주영만의 코고는 소리도 사라졌다. 검지와 검지가 만났다. 내 손가락 끝마디에 이안의 손가락 끝이 살며시 올려졌다. 손가락을 바닥 융선의 소용돌이 무늬를 따라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이안이 가진 무늬는 어떤 모양인지 온 신경을 집중해서 꼼꼼히 훑어 내렸다. 빙글빙글 소용돌이 모양으로 손가락과 손가락이 춤을 추었다. 밭고랑 모양 곡선의 요철을 따라 오르막과 내리막을 쉬지 않고 달렸다. 눈을 떴다. 이안도 눈을 떴다. 마주 보며 이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이안 뒤로 작은 창문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 밑으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첫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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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디지?” 지민이는 꽃다발 사이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르겠어? 원래 지박령은 죽은 곳에서만 머물러야 해. 여기는 바로 네가 죽은 곳이고. 근데 너는 순환 열차로 뛰어들어서 영혼이 순환선과도 서로 얽혀 버린 것 같아.” “그럼 이 꽃다발은…….” “이건 다 너를 위한 거야. 널 까맣게 태워 버린 사람보다 널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고.” 지민이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 노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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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에 씌어 보니 어땠어?” 한해정이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무서워 마. 널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죽은 건 네
가 아니라 나야. 내가 지박령이지. 조금 전의 경험은 모두 한해정, 내가 겪었던 일이야. 나는 지금도 매일 지박령 열차를 타고 같은 자리를 돌고 있어. 만날수록 자꾸 더 그리워지는 엄마를 매일 만나고, 세월이 제법 흘렀는데도 나를 기억하고 찾아오는 친구도 만나. 하지만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도 말을 할 수도 안아 줄 수도 없어. 이 기분, 이젠 너도 알겠지?” 한해정의 눈에서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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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 큰 선배를 제압하는 강주를 보는 순간, 나는 이거다 싶었다. 나는 늘 뭐라도 잡고 매달리고 싶었다. 누구도 나를 어쩔 수 없도록 힘이 세지고 싶었다. 시작은 그랬다. 그런데 하다 보니 운동이 좋아졌다. 역기와 하나가 되어 땅을 짓누를 때 발바닥에 전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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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라야, 이제 돌아가야 해. 우리 함께 가자.” 마지막 한 조각이 없으면 남을 줄 알았는데, 엄마는 풀린 매듭을 움켜쥐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뒤로 감추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살 수 있을까? 엄마랑 벼
리랑 함께라면 살 수 있는데. “엄마, 끝매듭이 풀렸잖아!” 내가 울먹였다. “나에게 끝매듭은 너희들이야.” 엄마는 내 오른 손목을 낚아챘다. 순간 내 몸은 가볍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두둥 한번 떠오른 몸은 내 마음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자석처럼 엄마가 이끄는 대로 공중을 날아 거실을 지났다. 그래. 어쩜 엄마를 따라가는 게 편할지도 모르겠다. 버티고 매달리던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쫙 풀렸다. 공중에 뜬 몸은 베란다를 지나 창문 밖 허공으로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빠밤 빠빠바밤 빰빰빰. 그때 내 방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다. 내 귀가 꿈틀댔다. 강주에게서 온 전화였다. 학교, 강주, 역도, 친구들……. 여기엔 내 것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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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옷이 더 세차게 펄럭거렸다. 난간을 잡은 손이 점점 풀리고 있었다. 엄마가 혼자 멀리 떠날까 봐 늘 불안했다. 겨우 생각해 낸 게 매달리는 일이었다. 함께 살자고 매달려도 보고, 그게 아니면 뭐든 붙잡고 매달리면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여기에서 살려면 매달릴 힘이 내게 필요했다. 처음 만난 강주에게 살려 달라 매달린 이유였다. “엄마!” 하늘을 보던 엄마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엄마, 나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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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매일 맞는다. 왜? 너는 그 애보다 키도 더 큰데.” “그게…… 싸움은 덩치랑 상관없더라고요. 근데 이번에 치국이 말리다가 나도 힘이 많이 세진 걸 알았어요. 다음엔 맞고만 있진 않을 거예요.” 뒷머리에 콩의 손길이 느껴졌다. 콩이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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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선이 필요했어. 경계선을 넘어 벗어날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좀 쉬고 싶어.” 녀석이 담담한 목소리로 바닥에 선을 그으며 말했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나는 쉽게 대답을 못 하고 눈만 마주쳤다. “엄마랑 나 사이에는 경계선이 없거든. 학교에 있어도, 내 방에 숨어도, 어디에 있든 난 엄마를 벗어날 수 없어.” 녀석이 말을 이었다. “그때 비의 경계선 얘길 들었어. 왠지 비의 끝을 뚫고 나가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래서 그곳에 가고 싶었는데…… 무서웠어.” 현수의 표정이 엄마한테 전화 왔을 때처럼 일그러졌다. “엄마가 그렇게 무서워?” 현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현수 이야기를 들어 줄 시간이 있을 것 같아 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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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대사천! 사진 한 방만 같이 찍자.” 얼굴에 다시 웃음을 찾은 현수가 다가왔다. “비의 경계선 없어지기 전에 찍자. 구름 우산 오류가 수정되어서 곧 비를 멈출 거래.” “근데 아까부터 사진은 왜?” “경계선을 넘어 쉬고 나면 다시 돌아가야 되잖아. 우리 엄마니까. 그러려면 보험이 필요하거든. 수학 천재랑 함께 있었다는 증거 사진. 우리 엄마는 너라면 다 용서가 될 거거든. 흐흐흐.” 나는 팔꿈치로 현수의 옆구리를 쳤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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