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생 인연멸,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입니다. 그래서 인연가합(因緣假合)이라 하여, 인과 연이 가짜로 화합했을 뿐이라고 하고, 그것을 무아(無我)라 하고 공(空)이라고도 합니다. 거기에 무언가 뜻을 찾고, 진실을 찾을 이유는 없습니다. 심지어 선에서는 견성(見性)을 체험하는 순간의 그 느낌조차 왔다가 간 것일 뿐이니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수행 중 만나는 놀라운 체험 대처법」중에서
좋은 때가 따로 있고 좋은 곳이 따로 있다는 생각 자체가 허망(虛妄)한 분별망상(分別妄想)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게 되면 그날이 아니고 다른 날 이사를 하게 되었을 때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고, 혹시 조금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때 날짜를 잘못 받아서 이사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거야.’라고 해석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가 그 생각에 갇히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이럴 거다, 저럴 거다.’ 하고 규정지어 놓은 그 생각이 괴롭히는 것이지 본래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있는 곳이 그것이 있어야 할 곳」중에서
두잉(Doing, 행위)을 칭찬해 주는 것은 잘하고 못 하는 것을 분별하고 비교해서 칭찬해 주는 것입니다. 아주 안 좋은 칭찬이죠.
그런데 존재 자체, 빙(Being)을 칭찬해 주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있는 그대로를 봐주는 것이 진짜 칭찬입니다. 이건 유위(有爲)가 아니라 무위입니다. 그 아이를 그대로 거울처럼 비춰주는 것, 자기 본성을 거울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거울처럼 그대로 비춰주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칭찬」중에서
업장을 참회하는 발원은 무엇일까요? 경전의 내용처럼 업장(業障)을 참회한다는 것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탐진치 삼독심으로 지은 모든 업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업장을 짓는, 죄를 짓는 원인이 바로 탐 · 진 · 치(貪瞋癡) 삼독(三毒)입니다. ‘나’라는 아상(我相)을 세워 놓고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에 내가 있고 바깥에는 대상 세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업장 참회하기를 서원합니다」중에서
이 공부는 훈습(熏習)하는 공부입니다. 훈습이란 향을 피우면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안 했음에도 향 내음이 저절로 몸에 배는 것과 같이, 공부하는 회상에서 도반들과 함께 법비를 맞으며 그저 법문을 들었을 뿐인데, 저절로 공부가 무위(無爲)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서는 정법훈습(淨法熏習)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아난 존자에게 ‘이 공부는 좋은 스승과 도반 만나는 것이 깨달음의 전부’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공부 회상에 깃들어 법문을 듣고, 그 법의 향기에 저절로 공명하며 그저 법을 듣고 있었을 뿐인데, 공부는 저절로 됩니다.
---「훈습, 저절로 되는 공부」중에서
눈앞에 있는 이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삶을 자기 식대로 해석 판단해서 ‘저것은 저렇게 해야 해. 이대로는 안 돼. 지금 이 돈 가지고는 안 돼. 이 건강 가지고는 안 돼. 더 건강해야 해. 돈도 더 벌어야 하고, 자식들도 더 분발해야 하고, 내 인생에 더 좋은 일이 있어야 해. 저 사람처럼 내 인생에도 성공이 와야 해.’라는 자기 생각을 믿고 그 생각을 좇아온 게 지금까지 우리가 살았던 삶입니다. 눈앞 법신불의 완전한 삶을 버리고, 내 생각 속에서 가상현실을 구현해 놓고, 그렇게 생각으로 만든 삶을 자기 생각대로 통제하려고 애쓰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공부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선지식 스님들은 “제자들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합니다. 선지식의 손에는 따로 숨겨 놓은 것이 없다고 해서 ‘빈주먹’이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법은 스승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저마다 자기에게 다 드러나 있는 것이어서, 숨길 수 있는 것도 숨겨진 것도 아닙니다.
---「눈앞이 완전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