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막막한 질문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니체는 이런 고민을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가치 있을까? 무엇이 의미 있고 좋은 삶을 만들까? 나의 우선순위는 무엇이고, 그 이유는 뭘까? 이런 가치관은 내 선택을 지배하고, 내 열망과 목표와 행동의 근거가 된다.
따분하거나 초조해지고 삶이 만족스럽지 않은 순간이 오면, 니체는 바로 그때 그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연구하라고 간곡히 말했다. 니체가 보기에, 의문을 품는다는 건 어떤 형태든 정신이 건강하다는 신호였다. 어느 날 당신이 문득 멈춰 서서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이렇게 사는 게 옳은 걸까?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는다면 당신은 올바른 질문을 시작한 것이다.
---「프롤로그. 계획하지 않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중에서
우리는 종종 좋은 삶이란 개인의 발전을 위해 잘 짜인 프로그램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는 걸리기 쉬운 덫이다. 자기계발서에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조언들이 넘쳐난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목표 성취 시스템’, ‘목표와 결심을 현실화하는 5단계 전략’, ‘한 달에 백만 달러 벌기’, ‘나만의 MBA’ 등. 이런 책들은 대부분 목표 설정, 생산성, 시간 관리와 미 루는 습관 고치기에 대한 조언들을 찍어낸다. 이런 조언ㄷ의 문제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문제를 건너뛴 채 다음 허들인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로 질주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접근법이 제공하는 조언들로 무장한다면 분명 현재 상황을 벗어나 목표를 이룰 수 있을 테지만, 아마도 예전과 똑같은 초조함과 불안감에 휩싸여 다시 맨땅으로 떨어진 채 자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정말 내가 원하던 삶인가?’
누군가에게 번영의 기술이란, 은행 잔고를 두둑이 하고 물질을 안정적으로 소유하기 위한 생산적인 활동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다. 좋은 삶이란, 물건을 사고 그것을 지불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런 삶에는 번쩍거리는 검은색 자가용이나 멋진 집을 소유하고,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내고, 특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리조트로 자주 떠나는 일의 흥분감이 포함돼 있다. 이런 부류는 소유를 목표로 정한 뒤 모든 결정을 그 방향으로 몰아간다. 부동산에 투자하고, 이율이 높은 계좌를 터서 적금을 붓고 매달 충실히 카드값을 납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계속 갈망하며 살아가길 바라는가?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이것만 이루고 나면 나는 행복해질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집을 장만하면, 월급만 오르면, 집수리만 끝내면, 그러면 나는 행복해질 거야.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더 넓은 의미로 확대될 수도 있다. 동반자를 찾는 것, 살을 빼는 것, 아이를 갖는 것, 일을 그만두는 것, 일을 찾는 것, 혹은 의미 있는 일을 찾는 것. 일단 내 열정을 쏟을 일을 찾고 나면, 그러면 나는 행복해질 거야. 이런 맥락에서 행복이란 미래의 어느 시점이 된다.
---「프롤로그. 계획하지 않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중에서
여러 해 전에 나는 도시에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전망도 밝고 출세할 길도 여러 갈래인 안정적이고 보수 좋은 직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부름을 받았던 것 같다. 나는 그때까지 내 삶의 사운드트랙이었던 미디어와 인터넷을 꺼버리고 내 책임이었던 일과 의무를 등졌다. 그리고 미지의 거리를 걷고 산을 통과해서 사막으로 이어지는 여정에 올랐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분도 당신을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니체가 말했듯 진정한 내 길은 당장은 캄캄하여 모퉁이를 돌았을 때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다. 그는 이렇게 재촉한다. “당신 외엔 아무도 갈 수 없는 길이 딱 하나 있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물을 필요는 없다. 그냥 떠나면 된다.”
---「프롤로그. 계획하지 않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중에서
구경 외에는 특별히 해야 할 일 없이 도시를 방랑하는 사람을 프랑스어로 플라뇌르(Flaneur)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영어에는 같은 말이 없다. 파리 거리를 목적 없이 걸어 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가로수 늘어선 길이나 카페나 공원, 쇼핑 아케이드 등에 드나드는 일은 그곳에서 일종의 예술로 격상돼 있다. 플라뇌르는 철학적 스포츠 같은 것이다. 그 행위의 목적은 순전한 무익이다. 특별한 관심사도 없고, 마음속 목표도 없고, 어디를 가거나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그냥 걸을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순전히 시간 낭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샤를 생트뵈브는 목적지와 특정한 목표 없이 걷는 행위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정반대의 일’이라고 보았다.
철학 교수 키어런 세티야 역시 플라뇌르의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지혜롭다고 보았다. 목적지 없이 걷는 일은 언제든 우리를 덮칠 수 있는 권태감을 방지하고 따분함을 이기는 데 특히 유용했다. 행복한 결혼 생활 속에 자식도 낳고, 대학 정교수로 임용돼 중년에 접어든 세티야는 갑자기 엄청난 무게의 권태감을 느꼈다. “어떤 일을 해내면 그 일이 더 많은 일로 대체됐고 나는 반복과 공허함을 느꼈다.” 세티야는 시시포스와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리스 신들로부터 미움을 산 시시포스는 바위를 산 위로 밀어올린 다음 그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산 밑으로 돌아가 거듭해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끝없는 형벌을 받았다. 알베르 카뮈는 《시시포스 신화(The Myth of Sisyphus)》에서 “오늘날의 노동자들은 평생 매일 같은 일을 하고, 이 운명은 정말 부조리하다. 이것이 비극이 되는 것은 아주 드물게 이것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이다”라고 적었다.
---「3장. 번영의 터전을 찾아서」중에서
우리의 배낭은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무겁지만 그 안에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은 거의 없다. 육체적으로는 그렇단 이야기다. 헤드 랜턴, 침낭, 우천용 장비, 지도, 가이드북, 휴대폰, 보조 배터리, 손목시계, 카메라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대신 책만 잔뜩 싸 왔다. 대부분은 에피쿠로스의 《행복의 기술(The Art of Happiness)》,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의 대화(Conversations of Socrates)》 같은 철학 책이지만, 사회학이나 심리학 책도 간간이 섞여 있다. ‘어떻게 살까’라는 질문은 한때 철학적 사고의 중심이었고, 에피쿠로스·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우리의 과거가 없는 곳에서 이 고대의 생각들을 흡수하고 싶다. 평소 환경에서 벗어나 이 고대의 목소리들을 들으며, 계속 쌓이는 더러운 빨래나 기한이 지난 차량 등록 같은 잡일의 방해 없이, 필터링 없이 생각해보고 싶다. 잠시 동안만이라도 가정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수도승처럼, 진정한 경험으로부터 우리를 차단하려는 개입의 목소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의 가방에는 평소 관심 없던 분야의 책들도 들어 있다. 새로운 여정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자아를 탐구하는 용감무쌍한 여행자로서 우리는 융통성 있고 열린 여정이 필요하다.
---「3장. 번영의 터전을 찾아서」중에서
행복을 따라가라. 확실히 울림이 있는 말이다. 하지만 많은 이가 이런 자기계발서에나 나올 법한 번지르르한 모토에 비판적이다. 삶에서 진정한 목적을 찾는 사람들은 더 정확하고 과학적인 무언가, 알고리즘에 의한 복잡한 특징에다 신비로운 의미까지 함축된 무언가를 찾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을 때 기쁨을 황금률로 삼았다. 당신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별 자극 없이도,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하게 되는 일은 무엇인가? 시간만 있으면 언제든 할 것이기 때문에 굳이 당신의 ‘할 일 목록’에 올리지 않아도 되는 그 일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행복은 딸랑딸랑 울리는 종처럼 각자의 길을 알아보게 해주는 신호였다. 행복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알아보고, 느끼고, 감지하고,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즐거움과 행복감은 중요한 것을 암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현명한 조언을 받아들여, 나는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 순간들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종이와 펜을 준비해두고 잠깐씩 멈춰 생각해보는 거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니체는 우리의 여정에서 우리를 고양시키고 영감을 불어넣는 순간을 호기심을 갖고 의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당신이 진정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당신을 위로 끌어올려주는가.” 그는 우리가 스스로 ‘기본적인 법칙’으로 여기며, 사랑하고 명예롭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니체는 사랑하는 것들을 테이블 위에 쭉 늘어놓고 물건을 비교하듯 비교해보라고 조언한다. “다른 것들을 완성하고 확장하고 초월하고 설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사다리를 만들어 당신이 언제든 밟고 올라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가?” 니체는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s Educator)》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진정한 자아는 내면 깊이 숨어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를 넘어서는 무한한 높이에, 아니면 적어도 나답게 살기 위해 받아들이는 것 위에 자리하고 있다.” 당신이 행복한 순간을 따라가라. 그것이 당신이 삶을 바쳐 찾으려는 길로 인도하는 조약돌이 될 테니.
---「7장. 완벽한 작품은 없다」중에서
전자기기의 산만함이 지배하는 시대에 고급 독서는 다시 소수의 전유물로 돌아가고, 대다수는 톨스토이나 포크너 같은 위대한 문인들과 정신적 교류를 전혀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든다. 만약 정말 우리가 읽는 것이 곧 우리라면,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게 될 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책방을 열고 책을 잔뜩 들여놓고 팔기로 결정한다. 베스트셀러나 화려하고 커다란 책 말고 비소설과 고전으로만 채우기로 한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도 읽지 않는 책만 특화해서 팔겠다는 거다. 심오한 주제의 어려운 책들. 이 동네의 히피 서퍼들에게는 잘 안 맞는 책방이다.
그렇게 우리는 ‘시인’이라는 책방을 요란한 행사 없이 조용히 열고, 문학계의 거물들, 위대한 철학자들, 시몬 드 보부아르나 헤르만 헤세 같은 위대한 소설가의 몇 권 안 되는 책들을 진열한다. 거의 모두가 이미 읽었다고 불평하는 책들이다. 그래도 팔리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왜 늘 모든 것이 ‘새것, 새것, 새것’이어야 하나. 그건 고급 독서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 고전을 한 번만 읽고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15장. 내 인생을 바치고 싶은 일」중에서
어윙스데일, 높은 생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에서 이제 세 아이가 뛰어노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는 《뉴 필로소퍼》라는 잡지의 계획을 세워나간다. 지금은 종이에 인쇄하는 잡지를 창간할 때가 아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계획을 비웃는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철학 잡지를 만든다고?” “스포츠 잡지면 또 몰라, 철학? 대체 무슨 생각이야?” 하지만 이런 얕은 생각들을 일일이 상대할 가치는 없다
《뉴 필로소퍼》라는 잡지를 할 거냐 말 거냐 고민하기 시작하면 몇 달이나 몇 년을 그냥 흘려보내기 십상이다. 우리가 들여야 하는 비용·시간·에너지와 위험 요소를 따질 것이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러기도 했다. 하지만 일을 과도하게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미국 전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정보를 40∼70퍼센트 가졌을 때 자신 있게 선택할 수 있고 말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확보할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확보하라. 그리고 정보를 탑재한 본능, 본인의 직관에 주의를 기울이라. 내 분석적인 사고가 지시하는 것이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살면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조사도 하고 정보도 모으고 장단점의 목록을 만들어야 하는 건 맞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40퍼센트면 선택을 내리기엔 충분하다. 정보의 70퍼센트를 확보했을 땐 기회와 의욕을 잃기 전에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게 좋을 것이다. 삶에서 내려야 하는 어떤 결정이든 결국은 이 질문에 달렸다는 것을 나는 항상 기억한다. “결과와 상관없이 내 삶을 바쳐 하고 싶은 일인가?”
---「15장. 내 인생을 바치고 싶은 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