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는 이미지의 특성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글쓰기의 한 형태로서 고려해야 하고, 텍스트는 글의 특성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이미지의 한 형태로서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다음에 이어지는 논의의 목적은 한편으로 카프카의 그림을 독자적인 이미지로 이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글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카프카의 경우에는 그 관계에서 마치 텍스트와 이미지가 함께 해석학적 전체를 이룬다거나, 혹은 이미지가 텍스트에 시각적 형태를 부여하고 텍스트는 이미지를 설명한다는 식의 조화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카프카 작품에서는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에 마찰이 있다. ‘서화(書?)’가 아니라 ‘서/화’인 것이다.
--- p.211
이 회고에서 브로트는 특기할 만한 시학적 논지를 펼친다. 그가 다른 데서 쿠빈의 자질이라고 묘사했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복합 재능”이 카프카에게도 있다면서, 카프카의 그림과 글쓰기가 유사한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지금까지 누구도 카프카의 복합 재능에 대해, 그림과 서사를 바라보는 두 관점의 병존에 대해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브로트는 사실주의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개념의 공존이라는 측면에서 이 두 관점의 병존을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글쓰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림에서도 카프카는 성실한 사실주의자인 만큼…… 환상 세계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그림에서나 글쓰기에서나 카프카는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가 서로 관계를 맺게 한다고, 혹은 비록 “모순적인” 방식으로나마 두 세계를 “연결”시킨다고 브로트는 주장한다.
--- pp.237~238
카프카의 그림은 “그래픽”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전혀 자연주의적이지 않아서 세부가 “채워지지” 않았고, 장면을 온전히 묘사한 재현이 아니며, 회화가 아니다. 그저 연필이나 먹물로 그린 몇 개의 획으로 이루어졌고, 보여주거나 말하지 않으며 단지 암시할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카프카의 그림은 미학적으로 회화보다 그래픽아트에 더 가깝다.
--- pp.259~260
카프카의 텍스트에서 그림은 자주 문자적 대상으로, 사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림은 바로 대상 혹은 사물이기에 서술 텍스트에 시학적, 해석학적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유기적으로 통합될 수 없다. 도리어 그림은 혼란을 일으키고, 텍스트에서―분열적으로―도드라지거나 이물질로서 텍스트의 흐름에 침입한다. 이는 작품에 사진과 회화 작품이 등장하는 경우에 특히 그러한데, 그 예로 『변신』(그레고르 잠자의 방 벽에 걸린 모피 옷 입은 여자의 그림), 『실종자』(카를 로스만 부모의 사진), 『소송』(화가 티토렐리의 풍경화) 같은 작품을 들 수 있다. 대상으로서 이 그림들은 매체의 자격으로 등장해 집약된 의미를 기약하기 때문에 텍스트에서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도드라진다. 그러나 이 그림들은 텍스트를 따라 직선적으로,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읽히기를 거부한다. 카프카의 텍스트 속 그림들은 대단히 불투명하다.
--- pp.265~266
일부 비평가들은 카프카의 스케치가 파울 클레의 초기작과 비슷하며, 모더니즘의 확립된 미적 기준에 따르면 클레의 작품이 단연코 더 우수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카프카의 스케치가 하위 등급의 표현주의에 속한다고 말하고 논의를 끝내버리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그림 컬렉션은 너무나 다면적이고 흥미로워서 그런 식의 요약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러한 미적 판단은 이 스케치 작품들을 맥락에서 분리해 바라보는 경향이 있거나, 오히려 맥락과의 단절이야말로 그의 스케치가 추구하는 상태라는 점, 불완전성은 의도적이라는 점을 보지 못한다. 고문 장치를 구경꾼과 별개로 이해할 수 없듯이, 스케치도 그것이 분리되어 나온 텍스트와 별개로 이해할 수 없다. 이 스케치 작품들이 어떤 독립성을 지니든, 그것은 문자적 형식과 단절함으로써 얻어낸 것이다. 글을 이루던 선이 그래픽적 성격을 띠고 지면 위를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뻗어나가도록 변모함으로써 얻은 독립성이다. 글과 그림에 유사한 주제가 나타나더라도 장르에 따라 주제의 형태와 배치되는 방식, 심지어 주제를 이해할 수 있는 조건까지 달라진다.
--- p.285
카프카의 스케치 속 이미지는 윤곽이 온전히 이어져 있거나 완전히 묘사된 경우가 거의 없다. 거의 모든 연결 부위에 지면의 흰 여백이 끼어든다. 실제로 그 이미지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희고 평평한 표면일 뿐, 살과 피 혹은 신체적 결속을 위한 이상이 아니다. (…) 그의 그림들에서 육체는 고유의 적절한 형태로부터 탈주하면서 ‘적절성’을 까발린다. 육체가 포착을 피해 도망치는 형상이 되어 선으로, 동작으로, 허공으로 분해되려 할 때, 그 해체를 드러내 육체의 결합을 막는 균열을 숨기는 것이 바로 그 ‘적절성’이라는 것이다.
--- p.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