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한계상황적 ‘불안’에 놓여 있는 존재가, 그것을 해결하고자 홀로 그에 맞서는 상태를 뜻한다. 적어도 실존주의가 세상을 풍미했던 시대에는 여기서 인간 존재의 회복과 완성을 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고독은 버려야 할 으뜸가는 품성으로 매도되었다. ‘소비’와 ‘쾌락’을 지향하는 자본주의적 인간에게 고독은 금기였다. 외적 성장에 정신이 팔려 내적 성장을 가져다주는 고독을 애써 잊어버린 것이다.
--- p.18
‘solitude’의 어원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라틴어의 sol(혼자, 단독, 유일의)+it(가다, 있다)+tude(명사형 어미)로 보는 견해이다. …(중략)… 물론 ‘혼자 간다(있다)’고 해서 그것이 외로운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혼자’에 방점을 두고 찾다 보니 ‘고독’을 번역어로 택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태양을 마주하고 홀로 선 인간으로 보는 견해이다. ‘solitude’의 어원인 라틴어 ‘sol’을 ‘sohora’에서 유래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sohora’는 …(중략)… 다름 아닌 ‘태양’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solitude’는 ‘태양과 함께 가다(있다)’를 의미한다. 태양은 예나 지금이나 생명 에너지의 근원이다. …(중략)… 절대자를 향해 홀로 뚜벅뚜벅 기약 없는 발걸음을 내딛는 인간, 그것이 바로 ‘solitude’인 것이다.
--- p.30~31
‘고독’은 ‘혼자’ 있다는 점에서는 ‘외로움’과 궤를 같이하지만, 타인에 의해 강제로 혼자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어떤 필요 때문에 의도적으로 혼자 있는 것을 택한 것이다. 나아가 혼자 있는 상태를 즐기기까지 한다. 외로움은 누군가 곁에 있으면 해소되지만, 고독은 누가 곁에 있어 소통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정신적 허기가 채워져야만 비로소 해결된다.
--- p.36~37
일상의 모든 문제를 궁극까지 파 내려가면 거기에는 ‘한계상황’이 놓여 있으니, 결국 고독은 ‘한계상황’을 마주한 인간의 처절한 사유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사유로 시작된다 해도 종국에는 사유를 넘어 침묵으로 들어가야 한다. 침묵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것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의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침묵으로 침전하면 ‘비움’이 시작된다. 그러면 이제 생각 없는 생각이 우리를 이끈다.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아도 사념이 저절로 진행되어 가는 것이다. 그때가 ‘고독’의 절정이다. ‘무’와의 대면, 본성과의 해후! 고독의 진면목이 여기에 있다. 고독이란, 기존의 가치관, 이념, 분별지 등 모든 것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의 벌거벗은 상태로 홀로 있는 것이다.
--- p.46~47
실존주의자들은 이성주의·합리주의를 비판하고 ‘불안’이라는 감정을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 열쇠로 보았다. 이성을 중시하면 ‘고독’이라는 기제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고 강조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성을 통해 자명한 원리를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예리한 논리적 추론에 의해 진리(지식)를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매 순간 선택과 결단을 내려야 하는 불안한 ‘실존’에게 있어, 불안을 극복하는 길은 이성적 사고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우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그 방법으로 ‘고독’이 제시되는 것이다.
--- p.66~67
현실적 삶에서 오는 부조리, 불안, 탐욕의 문제를 자기 자신의 문제로 절실하게 체화하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이 사념하게 되면 ‘고독’으로 나아가고, 이때 비로소 ‘한계상황’이 극복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불안’이라 여기는 것은, 분별적 지식(에고)의 장막에 가려 본질을 왜곡한 데서 생겨난 오해다. ‘불안’을 대면하여 깊은 심층으로 침전하면 분별적 지식이 사라지고 심층의식인 ‘자타불이’의 마음이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불안’이라 여겼던 것이 실은 허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고독을 견뎌냈을 때 우리는 본래의 자기 자신과 조우하게 되며,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고독은 ‘자유’로 들어가는 성스러운 입구인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고독과 친숙해지거나 고독과 벗하는 법을 알게 된 사람은 금광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다”(『삶의 예지』)라고 한다.
--- p.70
니체가 말하는 창조성은 다름 아닌 고독에서 발현한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강제적으로 주어져’ 있던 것들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는 ‘창조’로 나아가게 된다. 고독은 창조적 삶을 살기 위한 기반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간절히 고독을 외치는 이유다. 그는 저서 속 인물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형제여, 너의 사랑 그리고 창조와 더불어 고독 속으로 물러서라. … 형제여, 눈물로 간청하노니 너의 고독 속으로 물러서라. 나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려 하며 그 때문에 파멸의 길을 걷는 자를 사랑한다.”
--- p.88
머튼은 참된 고독으로 나아가려면 그것이 명상 안에 뿌리 내려야 한다고 여겼다. …(중략)… 그가 말하는 명상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하느님을 직관하기 위한 ‘명상기도(묵상)’ 를 뜻하지만, 그는 일찍부터 동양의 명상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고독 속의 명상(Thoughts in Solitude)』, 『새명상의 씨(New Seeds of Contemplation)』, 『명상이란 무엇인가(What Is Contemplation)』 등은 그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는 일찍부터 선(禪)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신비주의와 선의 대가들(Mystics and Zen Masters)』을 비롯해 많은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더구나 장자에 매력을 느낀 그는 5년여의 연구 끝에 『장자』 원본을 번역하였는데, 지금 전해지는 『장자의 도(The way of Chuang Tzu)』가 그것이다.
--- p.110~111
릴케 역시 감정이나 영감이 아니라, 침묵과 고독 속에서 마음을 모두 비운 뒤 자연의 대상에 다가가 그것을 엄격하게 파악하고 묘사하는 것이 시를 쓰는 데 필수요건이라고 생각했다. 침묵 속의 울림, 그것이 시가 되고 조각이 되어야 한다. 이때 비로소 자기만의 창조적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시는 자연을 언어로 조각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이즈음이다. 그는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 즉 물리적 대상에서 조형적인 본질을 포착하고자 시도한 ‘사물시(Dinggedicht)’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로댕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릴케와 로댕 모두, 영혼의 깊이를 드러내는 게 예술가의 사명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고독’이라고 생각했다.
--- p.120
일찍부터 그의 가슴에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실존적 불안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불안에서 벗어나고 극복하려는 고투가 이후 그의 시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더구나 윤동주가 가장 흠모하던 시인은 ‘고독의 시인’ 릴케였다. 당연히 그의 시는 릴케의 시가 지향하는 곳과 나란했고, 그의 고독 역시 릴케의 고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조국의 상황 이전에 이미 불안과 고독을 배경처럼 깔고 있는 실존적 시인이었다. 그것이 그가 시를 짓게 만드는 근원적 힘이었다. 거기에 일제의 강점이라는 시대적 불운이 덧대어져 그를 깊은 ‘고독’ 속으로 끌고 들어갔던 것이다.
--- p.132~133
내면에 대한 응시와 성찰이 본격적으로 깊이 있게 표현된 작품으로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로 시작되는 〈자화상〉을 들 수 있겠다. 순간마다 선택과 결단을 강요받는 실존의 불안, 거기에 기름을 퍼부었던 일제 강점기. 때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강압적 창씨개명으로 극을 달리던 시대였다. 산모퉁이의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 들여다본다는 것은, 홀로 고독에 잠겨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우물’은 다른 작품에 자주 보이는 ‘방’과 함께 고독 속에서 내적 성찰이 이루어지는 지점을 상징한다. ‘들여다본다’는 것은 내면의 성찰을 말하니, 결국 이 시는 ‘고독한 자기성찰’을 노래한 것이다.
--- p.135
장자는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도)을 따르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비우고 또 비워 무위에 이를 것(損之又損之以至於無爲)’을 제시한다.(『장자』 「지북유(知北 遊)」) 일찍이 노자는 “학문을 하는 것은 날마다 모르는 것을 쌓아 가는 것이지만, 도를 체득한다는 것은 날마다 모든 선입견과 차별의식을 덜어 내는 것(爲學日益, 爲道日損)”(『도덕경』 제48장)이라고 하면서 철저한 ‘비움’의 사상을 전개했다. 장자는 이를 계승한 것이다. 이 연장선에 ‘좌망(坐忘)’과 ‘심재(心齋)’가 있다. ‘도추’와 ‘환중’에 서기 위해서 장자가 제시한 것이 바로 좌망과 심재다. 어떻게 비우는가에 대한 장자의 대답이며 ‘고독’과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 p.158~159
장자는 정신세계를 노닐 때 비로소 인간의 ‘대자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소요하는 인간의 대자유! 그것은 깊이 내면을 탐색하는 자의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고독한 자의 성취물이다. 대붕은 깊이 고독에 잠겨 정신세계를 소요한다. 그런데 세상의 자잘한 일상을 떠나, 홀로 3천 리를 달리고 9만 리 상공을 비행하지 않으면 고독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도 ‘대자유’를 얻으려면 3천 리 물길 위를 달리고 9만 리 하늘길을 날아 깊은 고독에 들어야 한다. 그러면 물고기가 새가 되고, 나비와 내가 하나가 되는 신비한 세상이 열린다.
--- p.167
싯다르타는 자신에게 주어진 부귀, 권력, 명예 등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보다 높은 세계, 진리의 세계를 찾아 ‘고독’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출가 이후, 사상이 무르익고 완성되어 깨달은 자(붓다)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한마디로 ‘고독’의 여정이었다. 당시 인도에는 기존의 종교·사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파니샤드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종교와 철학이 우후죽순처럼 번성하였는데, 새로운 사상을 추구해 집을 떠나 수행하는 사상가와 수도자들을 ‘사문(沙門)’이라 한다. 그들은 모두 전통사회의 구속을 벗어나고자 출가하여 자유로이 사색하면서 살아갔다. ‘고독’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이다.
--- p.171
명상이 익숙해지면서 이 ‘고요’의 시간이 점차 길어졌고, 내면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급기야 내면의 목소리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그러면서 무심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가 이른바 순수의식의 상태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처럼 떠오르는 생각과 그것이 사라지는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훈련을 통해, 그는 자기 멋대로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이 순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더욱이 홀로는 존재할 수 없는 ‘연기’의 산물임을 깨달았다. …(중략)… 모든 탐욕은 ‘자아’ 관념에 뿌리박고 있는데, 이 ‘자아’가 허상이고 따라서 ‘무아’임을 깨달음으로써 탐욕의 불을 끌 수 있게 되고, 비로소 그 끈질긴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 p.184~185
실존주의는 불안이라는 마음의 양상을 통해 고독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동양사상, 특히 불교와 노장사상은 불안한 마음 자체를 부정하고 단도직입 ‘무’로 들어가고자 한다. 다시 말해, 실존주의는 불안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지만, 동양사상은 불안한 마음 자체가 없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 p.187
물론 실존주의나 동양사상이나 최종 목적은 같다. 본래 마음자리를 깨닫기 위한 것이다.
명상은 무심의 상태이고, 순수한 각성이다. 명상을 하면 반응이 근원인 ‘무’로부터 나온다. ‘무’란 ‘nothing’이 아니다. 에고의 생각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의식(심층의식)을 말한다. 이때, 자발적으로 표출되는 ‘무’가 스스로 ‘무위의 행함’을 진행해 간다. ‘불안’에 대면하여 ‘내맡김’으로써 ‘불안’을 극복하려는 실존주의의 ‘고독’이 의미 있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며, 이는 명상적 방법과 연결된다.
--- p.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