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여러 해가 지난 뒤에 이번 재판을 펴내기 위하여 《안과 겉》을 다시 읽어보노라니, 어떤 페이지에서는 그 서투른 글 솜씨에도 불구하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래, 바로 이거야'하고 알게 된다. 이것, 즉 그 노파, 어떤 말 없는 어머니, 가난, 이탈리아의 올리브나무들 위로 쏟아지는 빛, 고독하지만 사람다운 사랑, 나 자신의 눈에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믿어지는 그 모든 것 말이다.
--- p.22 「서문」중에서
삶이라는 꿈속에, 여기 한 인간이 있어, 죽음의 땅 위에서 자신의 진리들을 발견했다가 다 잃고 숫한 전쟁과 아우성, 정의와 사랑의 광란, 그리고 또 고통을 거쳐, 죽음 그 자체가 행복한 침묵인 저 평온한 조국으로 마침내 돌아온다. 그리고 또 여기… 그렇다, 적어도 내 그것만은 근거도 확실하게 알고 있나니, 바로 이 추방의 시간에도, 인간이 이룩하는 작품은, 예술이라는 우회의 길들을 거쳐서, 처음으로 가슴을 열어 보였던 두세 개의 단순하고도 위대한 이미지들을 다시 찾기 위한 기나긴 행로에 다름 아니라고, 꿈꿔보지 못하게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 p.29 「서문」중에서
이 모든 것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기막힌 진실. 영화 구경을 가느라고 내버려둔 여자, 아무도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이 없어진 노인, 아무런 속죄도 되지 못하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이 세상 가득한 저 모든 빛. 이 모든 것을 다 함께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세 가지 운명의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그러나 각자에게는 저마다인 죽음. 하여간, 그렇기는 해도 태양은 우리의 뼈마디들을 따뜻하게 덥혀준다.
--- p.47 「아이러니」중에서
그렇다, 모든 것은 단순하다. 만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들이다. 우리에게 어설픈 수작은 하지 말라. 사형수를 가리켜 "그는 사회에 대하여 죗값을 치르게 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이제 그의 목이 잘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보기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기의 운명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 pp.65-66 「긍정과 부정 사이」중에서
물론 나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을 뿐이다. 프라하에서 나는 벽 사이에 갇혀 숨이 막혔다. 여기서는 세계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내 주위로 투사된 나는 나를 닮은 형상들로 이 우주 전체를 가득 채워놓고 있었다. 나는 아직 태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 빈곤의 세계에 대한 나의 애착과 사랑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나는 이제야 비로소 태양과 내가 태어난 고장이 주는 교훈을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pp.83-84 「영혼 속의 죽음」중에서
그렇다. 이 고장들의 언어가 내 속에서 깊이 울리는 그 무엇과 일치되었던 것은, 그것이 나의 질문들에 답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질문들을 무용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내 입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의 작용들이 아니라 쏟아지는 햇빛에 짓눌린 풍경 앞에서가 아니고는 생겨날 수 없는 그 '나다Nada(허무)'였던 것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 삶에 대한 사랑은 없다.
--- p.96 「삶에 대한 사랑」중에서
한 사람은 관조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의 무덤을 판다. 어떻게 그들을 서로 분리해 생각하겠는가? 인간들과 그들의 부조리를 어떻게 분리해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여기 미소 짓는 하늘이 있다. 햇빛이 부풀어 오른다. 곧 여름이 되려는가? 그러나 사랑해야 할 사람들의 눈과 목소리가 여기 있다. 나는 나의 모든 몸짓으로 세계를 붙잡고 있으며 나의 모든 연민과 감사를 통해서 인간들을 붙잡고 있다. 세계의 이 안과 저 겉 중에서 나는 어느 한쪽을 택하고 싶지도 않고 또 남이 택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 p.105 「안과 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