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어떤 식으로 나누더라도 어느 쪽 비행기든 한 대만 추락할 경우, 죽어 버린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후회가 남을 거 아냐? 그럴 바에야 우리가 타는 비행기는 추락하지 않으리라 믿고 가족 모두 한 비행기에 타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해. 여러 가지로 짝을 나누어 봐도 그중 어느 것도 함께 타는 것만은 못해.”
(···)
“가족 모두가, 전혀, 타지 않고, 집으로 가 버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p.48
기이한 양의성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원래는 엷은 빛이 널리 퍼져 있던 멕시코의 광활한 하늘에 점점 붉은 가루 같은 기운이 떠돌기 시작할 때부터 마침내 해가 질 때까지 길고 긴 시간 동안 나는 그 느리고 느린 시간의 진행 속도에 짜증이 난 적이 없었다. 시간이 고여 있는 웅덩이 속에 내가 마치 플랑크톤처럼 떠 있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 p.85
나와 자네의 영혼도 언젠가는 육체를 벗어나서 숲에 있는 각자의 나무뿌리로 돌아가 다시 한번 ‘영원한 꿈의 시절’의 풍경을 발견하게 되겠지.
--- p.91
모든 사물을 끝내기 위하여
내 힘겨운 삶이 그리던 것
반쯤 그리다 만 것조차도, 반쯤 쓸 수 있었던 페이지마저도.
오오, 하지만 우리는 꿈꾸고 있었다.
--- p.105
그렇게 막상, 만나 보고 난 뒤의 마음에 비하자면, 이렇게 생각하지나 말 것을, 옛날이 그립고나, 지금 내 신세.
--- p.108
‘그리운 시절’, 이제라도 그곳에 돌아가면 젊은 기이 형이 있고 도심의 혼란에 길을 잃기 전의 더 젊은 내가 있는 곳. 가라스야마 복지작업소의 지적 장애가 있는 직공이 아니라 아름다운 지혜로 가득 찬 내 아이 히카리도 있는 그곳. 나는 그 ‘그리운 시절’을 향하여 편지를 쓴다.
--- p.177
어른들이 보금자리라 부르는 골짜기를 떠나지 않으리라던
어린 시절의 덧없는 맹세를 생각하네···.
--- p.195
내 머릿속에는 어른들이 어리석게도 기분 좋은 듯이 되풀이하는 “더는 못 참겠어요!” 하는 대사가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고 그것은 혐오감뿐 아니라 어떤 관능적인 메아리를 불러일으키는 듯도 했다.
--- p.236
나는 기이 형이 주둔군 병사에게 이야기한 ? 자기가 이 마을의 역사를 연구하고 친구가 그것을 책으로 쓴다고 하는, 그 쓰는 이에 내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얼마나 깊은 자랑스러움과 기쁨으로 받아들였던가!
--- p.260
화장을 짙게 했는데도 미세스 오타의 피부색이 검게 가라앉은 듯이 보였다는 것, 그리고 보기 흉할 정도로 큼직큼직하게 생긴 아메리카 여성의 얼굴은 금색 솜털이 있고 하얀 가루가 일어나는 듯하면서도 피부가 말갛게 보였다는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의 인종적인 자아 발견은 주둔군의 지프가 처음 골짜기의 마을에 들어오던 날 시작되어 이 CIE 도서관의 사무실에서 완성된 셈이다···.
--- p.301
얼마 전에 재혼한 아키야마의 어머니가 보내 준 돈으로 빌린 방에 언제나 모여드는 그들이 지닌 클래식 음악이나 서구의 그림들에 대한 지식에 대비되는, 그야말로 [naif] 같은 소리를 하는 어릿광대가 내 역할이었는데 그런 내가 사실은 남몰래 수험 공부에 열을 올리는 엉큼한 녀석이었다고 여겨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p.312
오전 중에 시험이 끝난 마지막 날, 일찌감치 사무실로 돌아와 소파에 드러누워 새삼스럽게 첫날 치른 수학 시험을 생각하면서 커튼을 떼어 낸 유리창 너머로 공장 건물의 처마에 앉은 참새를 올려다보려니까 참새 하나하나의 윤곽이 전부 이중으로 보였다. 나는 그제서야 일 년 동안 수험 준비를 하느라 내 눈이 근시나 난시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숲속 골짜기에 그냥 있었더라면 시력을 떨어뜨릴 일도 없었을 텐데, 하는 돌이킬 수 없는 실망감에 사로잡혔다···.
--- p.321
내가 기이 형의 편지 중 이따금씩 떠올리는 한 구절은 “처녀작은 작가의 마지막을 보여 준다”는 말이다.
--- p.393
전쟁기를 산촌의 어린아이로 보내고 전후에는 신제 중학 세대로서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연령층의 발언이라는 것이 나의 모든 시사적인 에세이를 꿰뚫고 있는 주제였다.
--- p.403
기이 형을 따라잡아 둘이서 어깨를 겯고 유쾌하게 웃으며 숲속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틀림없이 행복한 삶이 있다. 하지만 그 결단과 실행을 다름 아닌 바로 그 가련한 기고만장함이 방해하고 있다.
--- p.435
날마다 우편물을 가지러 문간으로 갈 때마다 한두 통씩 섞여 있던 심술궂은 편지. 한밤중이면 걸려 오던 고함을 치거나 아무 말도 없는 전화. 신문이나 문예 잡지의 칼럼에 실어 보내는 야유. 나와 아내가 이러한 것들에 밤낮으로 포위되어 있다고 느꼈던 도쿄 생활에선 오히려 그런 것들에 대해 공격적인 반응이 솟아났었다. 젊음과 무경험에서 오는 강경함이라는 것도 있어서 때로는 오히려 전보다 기력이 넘친다고 할 정도였다.
--- p.501
내가 날마다 대학병원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아기의 상태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머리 뒤에 붙은 미끈미끈한 혹과 함께 날마다 성장해 가는 신생아에게서, 평생 지게 될 책임을 피해 보려 도망 다니면서도 정신이 들어 보면 어느새 나는 특수아실 유리창 앞에서 있곤 했다.
--- p.531
저는 학원이나 대학 강사처럼 상향 단계라는 것이 있는 커리어와는 완전히 인연을 끊을 작정입니다. 그리고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가이드를 하려고 합니다.
--- p.539
나도 소설이라는 형태로 이 세상과 그것을 넘어선 세계의 모델을 만들고 싶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 p.611
이리하여 우리는 쓸쓸한 바닷가,
그 물을 건넌 이가 일찍이
돌아온 적이 없는 곳에 이르렀더라.
--- p.615
기이 형을 돌봐주고 나서 옷을 벗은 오셋짱은 거무스레하지만 군살은 붙지 않았고 동그스름한 하복부에는 짙은 음모가 근사한 장식품처럼 붙어 있는 자그마한 알몸을 가볍게 침대에 올리더니 비스듬히 앉았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미세한 땀방울이 덮인 얼굴로 이쪽을 보더니 혼자서 알몸이 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진지한 검은 눈으로 위협했다.
--- p.642
기이 형, 이 그리운 시절 속, 언제까지나 순환하는 시간 속에 사는 우리들을 향하여 나는 몇 통이고 몇 통이고 편지를 쓸 것이다. 이 편지를 비롯한 그 편지들이 당신이 사라진 현세에서 내가 죽을 때까지 써 나갈, 이제부터 할 일이 되리라.
--- p.6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