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교육 시장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렇게 작동하는 사교육이 공교육과 어떤 상호작용을 주고받는지, 교육정책과 수능 출제에는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 이 책에서는 악마화와 신비화의 오류를 벗어나 사교육의 실질, 더 나아가 수능이라는 시험의 실질을 담으려 합니다. (…) 수능과 사교육의 작동원리를 면밀히 기술하고 사교육과 공교육, 제도가 상호 작용하는 방식을 조명합니다. 또한 지금의 수능이 어떤 식으로, 얼마나 변질된 시험인지를 논증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국 교육과 사회의 총체를 그립니다.
---「서문」 중에서
ADHD를 치료하는 데에 쓰이는 약물은 특성상 고도의 집중상태를 유발하는데, 이 때문에 ‘공부 잘 하는 약’이라 불리며 암암리에 팔려나가곤 합니다. 송파구와 강남구에서의 ADHD 약물 처방량은 근 5년 사이 2.5배가량 급증했습니다. 연 단위로 보면 9월부터 증가세를 보이다가 11월 하순에는 다시 감소하지요. 수능이 매년 11월 초중순에 시행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패턴입니다. 한편 유아 대상 의대 설명회가 열렸다거나, 과학탐구 문제를 어떻게 찍을지 알려주는 신점이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그걸 곧장 괴담이나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정말로 그럴 만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 p.6
선입견과 달리, 이 문제를 푸는 데에는 특별한 지적 능력이나 배경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절대정신이나 정반합의 철학적 의미 또한 몰라도 됩니다. 심지어 지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글자의 형태만 분간한다면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 p.12
수능은 결국 도구에 불과합니다. 잘 운영하면 도움이 되고, 잘못 운영하면 악영향을 끼치는 도구지요. 이제는 환상을 걷어내고 실질을 볼 때가 되었습니다.
--- p.35
결국 이런 형식의 시험에는 교육이 부재하거니와 능력 검증의 기능조차 없고, 어떤 면에서는 해롭기까지 합니다.
--- p.99
1) (3523.3/x)*327.4+552=2059.88일 때, x의 값을 계산기 없이 구하시오.
2) 흄은 미래에 대한 귀납 추론은 순환논증이므로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때 미래에 대한 귀납 추론에는 어떤 전제가 함축되어 있는지 추리하고, 그것이 순환논증이 되는 이유를 설명하시오.
위의 두 문제는 까다롭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방식으로 까다로운 것은 아닙니다. 1번 문제는 초등학교 교과과정 내의 지식을 묻고 있지만, 그 형식상 수학과 교수라도 짜증을 느낄 만합니다. 반면 2번 문제는 학부 저학년 수준의 과학철학을 묻고 있지만, 해당 분야에 식견이 있다면 세 문장 내로 설명을 끝마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현행 수능은 어떤 갈래에 속할까요. 2장과 3장에서 거듭 살폈듯이, 전자입니다.
--- p.113
평가원은 복잡한 퍼즐식 문항을 도구 삼아 점수 분포를 조절하고 있지요. 등급 커트라인에만 주목하면 ‘약한 불수능’과 적당 난이도 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퍼즐을 걷어내고 그 뒤편의 지식과 논리를 들여다보면 더없이 쉬운 수능이 된다는 겁니다. 즉 지금의 수능은 ‘불수능’일지 몰라도 ‘어려운 수능’일 수는 없습니다.
--- p.113~14
자석을 가져다 대면 자기장에 따라 철가루가 정렬되듯, 대치동의 영향력을 뼈대 삼아 전국 학원가가 재편된 셈입니다.
--- p.204
이러한 데이터를 종합하면 “강남 부모들은 전문직이니까 자식들도 공부를 잘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투박한 유전자론으로 강남 패권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선입견에 기반한, 잘못된 스토리텔링임이 명백해집니다. (서울 집중화에 따른 인구 유출을 감안하더라도) 10년 사이에 각 지역의 인적 구성이 이렇게까지 전면적으로 바뀌었을 리가 없으니까요. 핵심적인 차이는 지역의 교육 인프라 수준과 입시 정보 커뮤니티의 유무, 그리고 사교육 고도화의 진행 정도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 p.211~12
지방에는 정시를 대비시켜주는 학원도, 정시 노하우가 공유되는 지역 커뮤니티도, 수능 콘텐츠에 대한 인식도 없습니다.
--- p.215
따라서 공교육의 무기력을 논할 때 교사 개개인의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실제로 태만한 교사가 있을지라도, 그 사례를 전체로 확장하는 것은 실태 개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무기력이 공교육 현장을 파행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사교육 의존을 결정적으로 강화시킨다는 사실은 지적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 p.229
이렇게 소비자와 공급자의 경계선이 흐릿해지는 지점에서, 학원과 커뮤니티는 양방향 플랫폼으로 작용하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참여자를 소모시킵니다.
--- p.285
수험생 커뮤니티라는 신공동체는 기본적으로 공부의 문화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 이들 대다수는 공부 이외의 삶의 방식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모두들 경쟁 압력과 스트레스에 짓눌려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불안도 큽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공부 이외의 선택지를 모두 잊어버리며, 그럴수록 사교육 종사자를 믿고 따릅니다. (…) 최종적으로는 단순하고 말초적인 정동이, 불안과 분노를 핵심으로 삼는 문화가 수험생 커뮤니티를 지배하게 되고, 이것은 열망의 다른 일면이기도 합니다.
--- p.334~37
학벌을 향한 집단적 선망에는 공포가 깃들어 있습니다. 충분한 학벌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 죽고 말 것이라는, 생존에 대한 공포입니다. 이 감각은 2020년대의 현실이거니와 한국의 근현대사에 뿌리내린 것이기도 합니다.
--- p.460
한국은 분명히 공포와 불안의 힘을 통해 여기까지 달려왔지만, 그 동력의 내적 모순이 한국을 붕괴시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0.7명대로 떨어진 합계출생률과 40%에 가까워지는 수능 응시 N수생 비율이, 역대 최고를 기록한 사교육비 규모가 대표적인 증거겠지요. 어떤 목적을 위해 누구를 가르치는지, 가르침의 방식은 어떠해야 할지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세울 때입니다.
--- p.496~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