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과 정보화혁명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기대와 감탄을 반복했다. 우리는 “이런 게 개발되면 좋겠다.”라거나 “우와, 별 게 다 있네. 세상 좋아졌다.” 하는 말을 수도 없이 뱉으면서 살아간다. 기술 하나로 당장 생활이 편리해지는 걸 느끼니, 짜릿하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물건 앞에서 인상을 찌푸리겠는가. 과학기술과 혁신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엉켜서 부유하는 이유일 거다. 혁신이란 단어는 어감부터가 긍정적 의지와 궐기가 듬뿍 느껴진다. 영어 단어 ‘이노베이션(innovation)’에서는 신선함과 경쾌함이 동시에 분출된다. 그래서 쉽사리 고결하게 규정된다. 이는 혁신적인 것에는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기운으로 이어진다. 이 공기 아래서 개인들은 그저 편리함에 감사하기만 바쁘다. 정말로 혁신적인가를 따져 묻지 않는다. 편리한 현재에 대한 질문과 고민은 기술 발전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성찰하고 개선하자는 의도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프롤로그: 타임머신은, 없다」 중에서
피임약 덕분에 여성은 성에서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피임약 때문에 여전히 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약만 먹으면 걱정 없다’는 표현이 당연해지니, 여성이라면 꼬박꼬박 피임약을 챙겨 먹으며 임신을 스스로 예방해야 하는 것도 당연해졌다. 여성이 계획에 없던 임신으로 걱정하면 상대 남자는 누구이고, 그 남자는 피임을 왜 안 했냐, 가임기라 불안하다고 말했는데도 관계를 원한 것 아니냐 등등의 질문이 나와야 하는데 “피임약 왜 안 먹었어?”라는 추궁이 등장한다. 하지만 “여성은 당연히 스스로 임신할 수 없다”.
--- 「Chapter 2. (女) 괜찮을까? (男) 괜찮잖아!」 중에서
아마존의 환경 파괴를 세상에 알리다가 농장 지주에게 암살당한 노동자이자 환경 운동가 시쿠 멘지스(Chico Mendes)가 말하지 않았던가. 계급투쟁 없는 환경 운동은 단지 정원 가꾸기에 불과하다고(Environmentalism
without class struggle is just gardening). 과격한가? 계급, 투쟁이란 단어를 붙들고 해석하진 않겠다. 중요한 건, 불평등에 찬성하고 경쟁을 찬양하면서 환경을 걱정해 봤자 효과가 없다는 거다. 불편한 자본주의와 싸우는 게 불편하다면, 차라리 이 모든 환경 걱정은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믿는 게 솔직하다. 능력 없는 사람은 도태되어도 마땅하다고 여기면서 본인이 종이컵 사용을 자제할 순 있지만, ‘그러면서’ 일회용품 없는 세상을 꿈꾸는 건 망상이다.
--- 「Chapter 4. 편리해졌고, 끔찍해졌다」 중에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Angus Deaton)과 프린스턴대학교 명예교수 앤 케이스(Anne Case)가 제시한 절망사(deaths of despair) 개념은 한국 사회가 오피오이드 문제를 어떻게 고민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준다. ‘절망사’는 사람들이 죽는 선택, 혹은 죽을 수도 있는 나쁜 선택을 하는 원인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고자 한다. 저자들은 저학력 백인 하층 노동자의 생애에 주목한다. 이들은 제조업이 버텨 줄 때는 그럭저럭 먹고살지만, 경제 위기가 닥쳐오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이 당연함 다음에 ‘오피오이드 중독’이 이어진다. 중독에 휩쓸리지 않는 것은 일차적으로 개인 의지의 문제지만, 그 의지는 절망의 크기에 반비례하여 쪼그라든다. 그래서 사회적이다. 저자들은 절망사를 다룬 책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한국어판에서 한국의 자살률과 미국의 절망사는 배경이 비슷하다며 이렇게 묻는다. 한국인들이 ‘사회적 안식처(social mooring)’로부터 단절되지는 않았는지. 그런데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런 게 존재는 하냐고. 당신에겐 있는가?
--- 「Chapter 5. 약 주고, 병 주고」 중에서
스마트폰은 매해 더 ‘스마트해지고’ 있다. 30만 화소 카메라가 휴대폰에 달렸다고 신기해하던 게 20여 년 전인데, 지금은 2억 화소다. 용량도 어마어마하다. 사진, 동영상, 문서 등 휴대폰에 쌓인 온갖 데이터를 컴퓨터에 케이블을 연결해 전송할 필요도 없다. 몇 번 이것저것 누르면 알아서 어딘가에 저장된다. 이 깔끔함은 가끔 친환경적 행동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사진만 보더라도, 과거처럼 종이가 필요 없다. 두꺼운 앨범에 모으지도 않는다. 그러니 환경을 덜 파괴했을 거다.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 디지털 인프라를 둘러싼 국가, 기업, 환경문제 간의 지정학』의 저자 기욤 피트롱(Guillaume Pitron)은 그건 다 착각이라고 강력히 경고한다. 이 책의 원제는 ‘디지털 지옥(L’Enfer numerique)’인데 한국어판 제목에서 지옥의 의미가 훨씬 잘 드러난다. 지옥은, 지옥인 줄 모르는 사람들 덕택에 더 뜨거워지니까 말이다.
--- 「Chapter 7. 진화해서, 퇴보하다」 중에서
그러니까 아파트는 사회문제지만, 같은 이유로 사람들은 기어코 아파트를 선호하는 터라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 설움에 복받친 이들은 ‘당해 보니 부동산이 답’이라면서 이 악순환의 선순환에 적극 뛰어든다. 똘똘한 아파트를 구해야 한다, 이왕이면 브랜드가 좋아야 한다, LH는 절대 안 된다 등등의 이야기에 동의하면서. 아파트는 이 글을 보고 비웃을 거다. 아파트가 1인칭으로 등장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구절처럼. “나는 담론의 가상 세계에선 언제나 패배하지만 물질의 현실 세계에선 백전백승이다.”
--- 「Chapter 9. 비쌀수록, 차별하는」 중에서
운동은 그 덕택에 일상을 나태하지 않게 보낼 확률을 효과적으로 높이지만, 그게 반대쪽의 나태함을 증명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회는 운동을 하는 이에게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사람’, ‘고통을 이겨 내고 정신승리 한 사람’이라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하곤 한다”. 운동으로 몸을 바꾸면, 많은 관심과 칭찬이 쏟아진다. 달콤하다. 이 달콤함이 선을 넘게 한다. 운동의 중요성이 부각되니, 운동의 효능은 다른 효능에 비해서 사람에게 더 맘대로 말해도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유독 운동 권유만큼은 사람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예의를 건너뛸 때가 많다. (…) 운동의 효과를 말하고픈 이들의 들뜬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운동 때문에 정신이 맑아졌다는 간증이, 운동을 안 하는 이들은 정신이 맑지 않다는 ‘맑지 않은’ 논리로 이어져서야 되겠는가.
--- 「Chapter 10. 건강을 챙길 때, 건강이 강박이 될 때」 중에서
사회가 불평등하면, 에어컨을 언제든지 틀 수 있는 사람의 ‘틀지 않겠다’는 다짐과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을 틀 수 없는 사람의 푸념이 공존한다. 이 본질을 외면하고, 에어컨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만 부각되어 에어컨을 틀지 않는 의지를 지닌 사람이 ‘친환경적’이라며 주목받는 식으로는 지구의 기온을 되돌릴 수 없다. (…) 그러니 답은 에어컨에 없다. 던져야 할 질문은 ‘우리는 왜 에어컨 없이 살 수 없게 되었는지’다. 나아가 불평등에 둔감하면 아무것도 해결될 것은 없음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아마 이 글을 읽은 사람은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며 답답해할 거다. 그 답답함도 에어컨의 맥락에 담자는 거다. 에어컨을 파괴하자는 게 아니라, 순간적인 쾌적함이 주는 말초적 감각에 경도되어 ‘위대한 발명품’이란 표현만 남발할 때 미래 세대를 위해 반드시 던져야 할 책임 있는 질문이 사라지는 걸 경계하자는 거다.
--- 「Chapter 11. 나는 시원해지고, 우리는 뜨거워지다」 중에서
플랫폼 노동으로 먹고살면서 부당함에 항의하고 개선을 바라는 건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선택지는 하나만 남는다. 일을 하든가 말든가. 그런데 이 끔찍한 현실이 종종 ‘논리’로 둔갑해 이런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자는 토론마다 어김없이 등장한다. 대학생도, 심지어 중학생도 이런다. “싫으면, 안 하면 되잖아요. 누가 강제로 시켰나요?” (…) 혁신이란 말이 넘쳐 나면서 노동은 더 선명하게 구분되었다.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이 분명해졌다. 소수의 누군가가 디지털 플랫폼을 만들면, 다수의 노동자들은 전보다 더 통제받으며 밥벌이를 한다. “싫으면 하지 마!”는 이런 구조를 외면하는 빈정거림에 불과하다. 아무리 한쪽이 혁신적이라고, 그 반대편이 지옥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 「Chapter 14. 소비자는 편해지고, 노동자는 무너지고」 중에서
비행기가 없었다면, 많은 이들에게 ‘해외(海外)’는 한자 그대로 바다 저 멀리 미지의 공간으로 남아 있지 않았겠는가. 코로나 이전, 전 세계에서 비행기를 탑승한 사람은 45억 명에 육박했다. 관광 목적으로 해외를 방문하는 사람은 14억 명인데, 이 중 58퍼센트가 항공기를 이용했다. 지구촌 곳곳이 연결되니, 선순환만 있었을까? 연간 3,000만 명이 방문하는 바르셀로나에는 “Tourism kills the city(여행이 도시를 죽인다)”, “Tourist go home!(관광객은 집에 가라!)” 등의 문구가 곳곳에 적혀 있다. 가우디성당이 잘 보이는 구엘공원 전망대 근처의 큰 돌에는 “Tourist: your luxury trip my daily misery”라는 글귀가 쓰여 있어 화제가 된 바 있다. 누군가의 팔자 좋은 여행이 누군가에게는 매일의 불행이라는 거다.
--- 「Chapter 15. 갈 곳이 많아지고, 간 곳은 파괴되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