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못하고 삽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 전반에 깔려있습니다. 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체주의의 태도로 사회를 바라보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심이 가지는 힘을 믿어야 합니다. 집단을 보지 말고 귀를 열어 주세요. 예를 들어 윤석열 정부가 행한 편향적 수사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민주당의 반도덕적, 범죄 행위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양쪽 다 비판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시민으로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주변인에게도 이런 점을 여러 번 이야기했을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정치적 무관심 현상이 아닙니다. 외로움에서 나온 혐오, 무관심의 형태가 드러납니다.
--- p.43
여산 성당에서 테러당한 이후, 박창신 신부는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섰다. 그러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하고 이것은 후대의 유산이자 기록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찍은 필름들로 이 책이 기획되었다. 자연스럽게 이 책도 그가 지켜봤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구성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경과의 설명에 맞게 사진을 정리하여 배치했다. 기술적인 면에서 보자면, 그는 전문 사진작가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투박한 사진에서 나오는 평범함은 평범한 영웅의 역사를 대변한다. 여러분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군산의 항쟁 사건들을 이해하고, 그 안에 있는 숨은 가치들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 p.52
이어서 뒷면을 살펴보니 '듣고 돌려주어 함께 듣자', '서로 돌려 듣자', '민중 민주 민족 통일을 위하여 서로 돌려 듣자', '돌려 듣자'라는 표현들이 나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박창신 신부와 청년들이 군산 시내 전역에 강의 테이프를 뿌리며 썼던 구절이다. 이는 박창신 신부의 의식화에 대한 신념을 보여준다. 박창신 “내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한 사람을 의식화하는 거야. 한 사람이라도 의식화시키면 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해. 다시 그 두 사람은 또 한 사람에게 전파해. 다시 네 사람은…, 이렇게 서로서로 의식화가 되어서 결국 세상이 바뀌는 데 일조한다고 믿어.” 박창신 신부에게 의식화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가 수많은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이유였다.
--- p.98
Q. “경찰들이 감시가 있었다는데 그거에 대한 기억도 있어요?”
오금수 “그래가지고 내가 밖에서 망을 보고 상황을 알려주기도 했어. 경찰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 오룡동 성당 앞에 평화수퍼라고 있어. 그 앞에서 형사들이 우리 어디 가는지 감시도 하고 그랬어.” 시민강좌 초기, 시민들은 경찰들의 감시에 얼어붙었다. 신부는 신자들 위주의 강연을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신부와 청년들의 지속적인 노력이, 전국적으로 올라온 개헌 분위기와 맞물려서 시민강좌는 성행한다. 경찰의 삼엄한 감시에도 시민강좌에 참여해 준 시민들 덕분에 이 강좌는 유지될 수 있었다. 사회에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이름 없는 영웅이 될 수 있다. 시민이란 그런 존재이다.
--- p.109
임현순 “(정말로 안타까운 표정)학생들 생리 문제라든지, 그게 사실 큰 문제였지. 나는 그때 당시에 남자였기 때문에 그게 그렇게 심각한 일인지 몰랐어. 그게 막혀가지고, 학생들이 "현순이 형, 화장실 가봐요." 나는 학생들이 그렇게 열악한 데에서 용변을 보는지 몰랐어. 물이 안 내려가서 소변에 내 운동화가 빠지는 거야. 그럼 어떻게 여기서 학생들이 용변을 봤을고? 생리대가 떠다니고, 그걸 내가 그냥 맨손으로 뚫었어. 어떻게 해. 물이 빠져야 하는데. 그 생리대 다 걷어내고 쓰레기통에다가 담아가지고, 맨손으로 했다니까. 그거 뚫어가지고 기억이나. 나는 진짜… 지금도 그래. 학생들이 그 열악한 화장실을 어떻게 봤을까 하면은… 진짜 안 좋아. 아무 대책 없이 그런 학생들이 했을 때, 그런 것들 없이 그냥… 그냥 했다라고 봐(울컥)”
우리에게 이 사진 속 모습은 그저 뜯어진 벽지일 뿐이다. 그리고 구술로 여학생들이 족자 같은 것을 뜯어서 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이것은 단지 그뿐일지도 모른다. 독자들은 "족자를 뜯어서 쓴 그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구나"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지 그뿐인 사진이면 안 된다. 무슨 의미로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면, 현장 노동자들의 태도를 보면 된다. 이 사진을 본 노동자들(김철규과 임현순)은 우리와 다르다. 텍스트로 표현하는 것 이상을 이해하고 떠올리고, 감정을 분출했다. 우리가 이 사진을 통해 봐야 할 사실도 그들의 시선 끝에 있다.
--- p.171
광주 시민들은 군대에 의해 외부와 고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부에서 시민들끼리 서로 협력하였다. 이 안에서 폭력과 약탈 없는 시민자치를 실현했다. 독일기자 힌츠페터는 광주를 취재하러 갔다가 이들의 순박함과 자치 실현에 크게 감동했다. 외국인들도 외부에 이를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이렇게 광주에서 인권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에서 공동선이 실현되었다.
민중들은 전두환 신군부의 폭압에 다치고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을 챙겼다. 자신과 이웃을 '광주 시민'이라는 하나의 단일체로 인식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대가 없는 순수한 정의감이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학생을 포함한 많은 민주 세력들이 민중의 힘을 믿기 시작했다. 다양한 부문의 민중들이 함께 모여 끝까지 투쟁했다. 대중운동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학생 운동가들이 사회 운동에 투신하도록 만드는데 기여했던 것은 광주 민중들의 정의감, 사랑으로 피어난 시민 의식이었다.
--- p.241
15시까지 자체 행사를 진행했다. 16시부터는 시청에서 경찰과 1천여 명의 시민들이 대치하여 연좌 시위를 했다. 18시쯤에는 군산미군부대 주변의 기지촌 아가씨 4명이 태극기를 들고 참여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님을 위한 행진곡, 오월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노래를 불렀고 18시쯤에는 경찰에 연행자 석방, 환자들의 병원비 및 책임치료를 요구했다. 이제 시민들은 함께 참여했다가 다친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이웃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나섰다. 같이 싸운 이웃이 누군지, 이름도 얼굴도 몰랐다. 다만, 다함께 같은 사건,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며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 그렇기에 그들은 동료였다. 이에 경찰은 최루탄으로 대응했다. 시민들의 분노는 이미 하늘을 찌른 상태였다. 오전부터 학생들이 모아온 돌을 던졌다. 다시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 p.341
오금수 “그거 다 시민들이 친거야. 이건 이제 우리 쪽 넘어오지 말란 식이지. 긍게 뭐냐면 여기 바리케이드를 치면 ‘여기는 우리만의 해방 공간이다.’ 이렇게 해서 하는 부분이지.”
국본 군옥지부와 청년들은 시위 도중 시민들의 저력에 한두 번 놀란 게 아니다. 시민들은 시위를 주도하는 지도부 인사들의 예측을 매번 벗어났다. 사실 시위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리고 기간이 길어질수록 경찰이 강압적으로 나올 것임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저항력은 예측할 수 없었다. 그것은 큰 걱정거리이기도 했다. 6월 이전 대중들이 보여줬던 모습을 생각하면 걱정이 안 되는 게 이상하다. 그러나, 경찰의 강경 진압에 맞서는 것도 모자라서, 적극적으로 바리케이드를 치며 투석전을 펼쳤다. 국본 군옥지부 사람들과 학생들은 적극적인 군산 시민들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했다. 그리고 끝까지 서로를 믿고 싸우는 모습에 감복했다.
--- p.346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87년 이전부터 거리로 나와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외롭게 홀로 싸운 학생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황경수이다.(노무현정부 행정자치부 장관 정책보좌관)
황경수 “(6월 항쟁 전에)일련의 고문들과 부천 성고문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런 것들을 보고 분노하지 않고 공감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잘하는 걸까? 그게 맞는 걸까? 나는 오히려 그게 비정상이라고 봐요. 아니 그게 잘못됐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없잖아요. 근데 그걸 말하지 못한다? 그걸 나서지 않아요? 다 같이 나서면 되는 거잖아요.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예요.”
--- p.367
직선제 개헌이 가능했던 이유는 시민의 동원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언문의 이름에는 시민의 주체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6.29 선언이라고 부르면 그 주체가 시민이었음을 강조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했다."는 단편적 사실은 지도자 중심의 역사관에 잘못 빠지면, 노태우의 과오를 가리고 민주화에 기여한 정치인으로 인식하게 한다. 단순히 선언문을 발표한 사람은 노태우지만, 이 역사를 만든 것은 시민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선언에 대한 선언문 자체를 '직선제 쟁취 선언문'이라 부르고 싶다. 그렇게 되면 대중이 주체가 된 역사를 강조할 수 있다. 6월 항쟁은 시민이 쟁취한 역사이다.
--- p.380
경찰 “이 새끼야 살아있는 놈 중에서 생각해 봐.”
박정석 “…고문이 가해질 때마다 신음처럼 아무 관계없는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마 그때 문규현 신부님과 조성용 선생님의 이름이 나온 것 같다. 그것은 두고두고 나를 부끄럽게 하고 죄의식에 시달리게 했다.”
죄의식을 가지고 괴롭게 살아가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신군부의 매카시즘 안에서 고문당하고 평생 입을 상처를 받은 박정석 선생인가? 아니면 특별 승진을 바라고 산 사람을 송장처럼 만드는 고문을 했던 사람들일까?
--- p.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