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세웠으나 내리지는 못한 채 숲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선 나무들의 숲이었다. 하얗고, 곧은. 마치 빽빽이 솟아난 뼈들이 빛을 뿜어내는 듯한 숲이었다.
할머니.
그런 숲에서는 할머니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었으나 마침내 이르렀으므로.
할머니, 자작나무 숲이야.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죽은 사람은 대답할 수 없다. 할머니는 지금 내 차 안에 죽어 있고, 나는 그런 할머니를 버리러 가는 길이다.
--- pp.7-8 「자작나무 숲」중에서
“내가 뭘 어쨌다고!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느냐고!”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장 꺼내서 묻어줘! 묻어주란 말이야!”
남편이 그녀의 두 손목을 거머쥐었다. 손목이 부러질 듯한 악력이었다. 그녀는 또 한번 공포를 느꼈고, 더는 비명을 지를 수도 악을 쓸 수도 없었다. 남편은 곧 그녀의 손목을 놔주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일상적인 목소리였다.
“여기 묻을 데가 어디 있다고 그래.”
--- p.55 「빈집」중에서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의 원래 제목이 ‘열 명의 흑인 소년들’ 혹은 ‘열 명의 인디언 소년들’이라는 걸 안찬기는 역시 그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소설에서는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인형이 한 개씩 사라진다고 했다. 물론 예술가 숙소에 인디언 인형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안찬기 역시 이 상황이 소설과 지나치게 흡사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섬, 풍랑으로 끊긴 배, 고립, 죽음…… 그리고 각자의 이유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각자의 죄.
--- p.94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중에서
여객선이 들어왔다. 배가 섬을 떠날 때, 안찬기는 선창 너머로 높은 갯바위를 보았다. 언제 태풍이 불었냐는 듯 쨍하고 화창한 날씨라 눈이 부셨지만, 그래서 잘못 본 것이려니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 갯바위에 정말로 귀신의 손 같은 것들이 너풀너풀했다. 너풀너풀하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섬으로 밀려드는 파도의 포말들이 하얗게 일어서서 무수한 흰옷 입은 여자들로 변하는 게 아닌가. 여자들은 일제히 돌아서서 바다를 향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한 명이 투신하고, 또 한 명이 투신하고, 또 한 명이 투신했다. 이해할 수 없는 환영이었다.
--- pp.122-123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중에서
앤은 물속에 머리가 잠기자마자 그토록 악착같던 울음을 뚝 그쳤다. 하기야 물속에서 어떻게 울 수 있겠나. 머리가 물에 잠긴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유리 물그릇에 담긴 아이의 머리는 마치 강이나 바닷가의 자갈처럼 비현실적으로 부드럽고, 둥글고, 아름답고, 투명했다. 그때 아이의 발목을 붙들고 있던 나는 아이의 머리를 붙든 목사님을 바라보며 생각했었다. 내가 발목을 붙들고 있는 아이가 앤일까, 목사님이 붙잡고 있는 머리가 앤일까.
--- p.131 「물속의 입」중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안찬기의 눈살이 갑자기 깊이 찌푸려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설이 나오려는 걸 참으려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경찰에서 퇴임하면서 그는 술과 담배를 끊듯 욕설도 끊었다.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흰옷 입은 여자가 또 거기에 있었다. 또 거기에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젠장…… 다 잊어버린 환영인 줄 알았는데, 돌아오니 또다시 거기에 있었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 p.172 「탐정 안찬기」중에서
열지 마!
이번에는 분명히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흰옷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가 그에게 너풀너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의 눈길을 끈 것은 흰옷 입은 여자가 아니었다. 흰옷 입은 여자보다 더 기이한 것이 있었다. 출렁이듯 흔들리는 그림자였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돌덩어리 같은 무언가를 들고서.
--- p.180 「탐정 안찬기」중에서
그때 갑자기 목이 선뜩했다. 본능적으로 손이 뒷목으로 갔다. 손바닥에 물이 묻어났다. 묻어난 건 물기뿐만이 아니었다. 아이가 건져질 때, 미역처럼 늘어져 있던, 아이의 긴 머리카락…… 사진으로만 봤던 그 촉감이 같이 묻어났다. 아이는 엄마도 아빠도 없는 곳에서 혼자 물에 빠져 죽었다. 아빠가 손님들의 세계에 있고, 엄마도 이야기의 세계 속에 있느라 딸이 죽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가 죽어가며 할 수 있는 일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죽는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지옥에서 살아가게 될 엄마 아빠의 목을 휘어감는 일이었을까. 엘리베이터 천장에서 쏟아져내린 머리카락이 그의 목을 휘어감았다.
--- p.199 「여기, 무슨 일이 있나요」중에서
여기, 아무도, 안 계십니까? 누구 없어요?
침묵. 사사삭.
또 사사삭 하고 소리가 나는데, 돌이 구르는 소리는 아니었다. 돌이 구르는 소리가 사사삭 하고 날 리는 없었다. 그것은 외부에서 그를 문지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의 테두리, 그의 몸을 문지르는 소리. 그는 곰곰 생각했다. 그게 무슨 뜻일까. 그의 몸에 테두리가 있다는 것은……
--- p.210 「돌의 심리학」중에서
바위 아래서부터 자라난 길쭉길쭉 미끌미끌한 풀이 바위 위까지 올라와 흔들렸다. 그러다 바람이 불자 그 키 큰 풀들이 휘청휘청 일어섰다. 주유소 풍선 인형처럼 팔을 흔들며 일어섰다. 미친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늘어졌다 일어서고 일어섰다 늘어졌다. 발목을 거머쥐겠다는 듯이, 입맛을 짯짯 다시듯이, 혀를 내밀듯이.
--- p.244 「유카」중에서
자전거를 다리 초입에 세우고, 둘은 여전히 물에 젖어 있는 다리를 삼분의 일 지점까지 걸어서 갔다. 수기가 다리난간에 손을 얹었을 때, 명기도 같이 난간을 잡았다. 아주 잠깐, 둘의 손이 닿았다. 수기가 얼른 그 손을 떼어냈는지, 아니면 명기가 그랬는지, 아무튼 그 순간은 찰나처럼 짧았다. 그랬음에도 수기는 온몸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고, 깊은 홀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 pp.301-302 「그해 여름의 수기」중에서